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May 13. 2023

이별을 예의 있게 보내는 방법

책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2014년 제11회 일본 서점대상 2위를 한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을 읽었다. 일본 유명 부부 드라마 각본가(작가 두 명이 한 명의 필명을 쓴다)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자 무려 9년이나 걸린 출판작이다.



사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이 책이 1위인 줄 알았다. 올해(2023년)에는 일본 서점대상 역대 1위를 모두 다 찾아 읽고 말겠다!!!!는 불끈 불끈 결의 직후라 흥분(?)해서였는지 '일본 서점대상'을 검색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이 2위일 줄이야.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좋았다. 추천. 1위였다 하더라도 수긍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은 갑자기 죽은 사람 - 남편, 아들, 친구, 사촌 - 을 오랜 시간 간직한 채 살다가 이제 겨우 보낼 수 있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이름과 배경이 특이하다. 기자라 이즈미.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는데 부부 각본가 공동 필명이라고 한다.

이즈미 쓰토무(1952년생) & 메가 도키코(1957년생).



원래 부부가 함께 드라마 각본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소설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함께 처음으로 TV가 아닌 소설을 쓰게 되었고, 무려 9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9년이나 걸렸던 이유는 "배우를 상상하면서 쓰는 시나리오와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써야 했기에 무서워서 펜이 술술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책이 나오자마자 일본 서점대상 2위를 할 만큼 인기가 많아서 바로 같은 해에 동명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2014년 10월에 방송했는데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바로 볼 수 있다. 책이 마음에 든 데다가 애초 소설가가 아닌 각본가라고 했으니 드라마도 좋을 것 같아 조금 보았는데 으음, 나는 그냥 소설이 더 좋았다. 드라마는 뭐랄까... 공백 채우기식 억지 사족과 유머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 평을 보니 '잔잔해서 좋다' '힐링 드라마다'라고 많이들 하던데 책을 읽고 나니 드라마가 전혀 잔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의 코믹 캐릭터들이 책에는 하나도 안 나오니 책이 더 잔잔하고 깔끔한 전개를 가지고 있다.



만약 드라마로 먼저 보았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드라마에 더 좋은 평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드라마보다는 책을 더 추천하고 싶다.



목차는 위와 같다.



무무무는 죽은 남자 가즈키의 이웃 소꿉친구로, 여자. 가즈키 아버지가 임시로 붙여 준 별명이다. 승무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웃을 수 없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님 집에 들어와 밤에만 밖을 나오는 삶을 산다. 친구이자 이웃이지만 그렇게 친하다고도, 또 안 친하다고도 할 수 없는 가즈키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병문안을 갔었는데 죽었다는 이야기는 장례식이 지난 한참 후에 어머니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된다. 밤하늘에 별을 보며 가즈키는 아무래도 별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가즈키 아버지와 우연히 밤하늘을 보며 '주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선물했던 눈사람 인형을 가즈키의 유품으로 찾아 달라고 한다.



가즈키의 사촌은 가즈키가 죽자 가즈키가 남기고 간 고물 차를 가지고 간다. 수리 비용이 더 나올 정도로 무용지물이지만 22살에 결혼해 얼마 안 가 죽은 가즈키가 중고등학교 때 사귀고 잤던 예닐곱 여자들에 대한 무용담이 들어간 차를 결코 보낼 수 없다.(나중에 카섹스를 거짓이었다고 가즈키가 웃으며 고백했지만) 가즈키가 결혼 전에 이렇게 연애를 많이 했다는 걸 형수는 모른다. 왜 형수 같은 여자와 결혼했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한다. (그동안 사귄 여자들의 외모 성격과 너무나도 달라서). 나중에 가즈키의 유품 - 백미러에 달려 있는 눈사람 인형 - 을 찾아 돌려준다.



가즈키의 아버지는 일기예보관이다. 아내는 아들이 17살 때 죽었는데 아들마저 20대가 되자 곧 죽어 아들과 아내를 보내고 며느리와 아들이 죽은 지 7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이 살고 있다. '걸리는 주문이 있다면 풀리는 주문도 반드시 있다'며 자신은 '지칠 때까지 살아보겠다'라고 다짐한다. 며느리와 이렇게 계속 '가족'처럼 살고 있지만 계속 이렇게 평생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서 재혼하라고 한다.



가즈키의 아내는 가즈키가 22살 때 결혼해 시아버지와 셋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병에 걸려 사별을 하고도 계속 시아버지와 살고 있다. 애인도 있고, 애인이 결혼하자고 하지만 가족이라는 게 싫다며 거부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살하려는 초등학생에게 소원 3개를 들어주겠다는 약속으로 결혼 지참금 480만 엔을 선뜻 (빌려) 주고 다시 그 초등학생 여자애에게 기적처럼 받게 되는 현 애인을 보며 아,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건 있을지 모른다 -라는 믿음이 생겨 버린다. 그럼 살아도 괜찮다고, 가족이라는 걸 만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결심을 하자마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남편의 뼛조각을 죽음 남편 가즈키의 사촌과 사촌이 가지고 있는 가즈키의 차를 가지고 함께 그 뼈를 납골당에 두고 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시아버지에게도, 죽은 남편의 사촌에게도, 현 애인에게도 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을 보내준다.



가즈키의 엄마 이름은 유코다. 가즈키가 17살 때 병으로 죽었다. 희한하게 갑자기 눈물을 쏟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마다 사람이 죽는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다. 가즈키 아빠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런 유코의 성격이자 기질을 일기 예보를 잘 맞추는 사람과 같다고 말하며 자신을 이해해서. 갑자기 비 냄새가 난다느니, 무릎이 아프다더니 하면서 기계보다 더 날씨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코 당신의 능력은 그런 것과 같은 거야, 하면서. 중간중간 오랜 세월과 더불어 가즈키 아빠의 도박 문제로 사이가 소원했던 적은 있지만 살아 있을 때도, 죽었을 때도 남편과 아들을 사랑했다.



죽은 가즈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 맨 마지막에 나온다. 엄마가 죽었다. 가즈키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즐겁게, 성실하게 친구들과 놀고 연애를 하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한다. 어느 날 비가 오고, 밖에 나갔는데 우산 없는 여자애가 소나기를 피해 자신의 우산 속으로 들어온다. 길고양이를 안고서. 고맙다고 말하는 여자애에게 카레 냄새가 난다. 카레 먹었냐, 고 이 낯선 여자애에게 물으니 어제의 카레라고 한다. 따뜻한 빵을 사 오는데 고양이 이름 짓는 이야기를 하다가 고양이 이름을 빵으로 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좋다고 한다. 그리고 헤어진다. 가즈키는 마음이 채워짐을 느낀다.






책을 다 읽고 문득 나도, 가즈키의 아내처럼 만약 내가 결혼을 해서 남편과 시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죽었다면 - 그녀처럼 남편 뼛조각 하나를 몰래 간직한 채 7년 넘게 시아버지와 그냥 같이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이 남들이 보기에 부자연스럽고,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고, 또 언젠가 끝내야 하는 관계라는 걸 알아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바로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말(言)을 선물한 덕분이랄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사람은 누구나 말을 원할 때가 있잖아?"

"없는데요, 전."

"있다니까, 그럴 때가."

"말을... 요?"

"마법의 주문 같은 거라고 할까?"

"그런데 어떤 말을 선물하셨어요?"

"그건 비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효력이 떨어지니까. 내가 선물한 건 무무무한테만 효과가 있는 특별한 말이거든."

"저한테도 주세요. 저한테만 효과가 있는 특별한 말."

"안돼, 안돼."

"왜 안 돼요?"

"그거야 뭐, 데쓰코는 그런 거 안 믿으니까."

물론 데쓰코는 믿지 않는다. 단 한 마디 말이 문제를 해결해 주다니.


--


"내겐 이 인간관계밖에 없다든가, 이곳밖에 없다든가, 이 일밖에 없다든가, 그렇게 믿어버리면, 가령 심각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거기로부터 도망친다는 발상을 할 수 없어. 주문에 걸린 거나 다름없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주문이 있다면 그걸 풀 수 있는 주문도 이 세상엔 같은 수만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


슬픈데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데쓰코는 여러 가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살 생각이에요."


---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사람이 산에서 죽었어요."

(...)

"사실은 약혼자가 죽었다는 이야기, 거짓말이었어요."

"아니, 왜에요?"

"약혼자한테 마지막 순간에 차였어요. 그 자식, 아이가 생겼다면서 다른 여자랑 결혼해 버렸어요."

(...)

"데쓰 남편, 죽었어요?"

"데쓰코가 말 안 했군요."

"그렇게까지 깊은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요."

(...)

"나 왜 거짓말을 했을까? 정말 형편없는 여자야."

"아니,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죽었다니, 왜 그런 거짓말을."

(...)

"눈앞에서 사라졌죠? 그럼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

"그래요, 죽어버렸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


선생의 둥글게 굽은 몸이 '누가 뭐래도 해내겠다.'라는 의욕으로 넘쳐났다.


---


"죽어도, 역시 존재해요. 보이지 않아도, 있어요. 이제 만나지 못하겠지만 저, 그 남자랑 같이 살아가겠습니다."

"그럼, 저도."


---


그러니까 골랐다기보다, 이제 그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


야기 주키치 - 일본 시인


내 안이라도 좋다

내 밖의 세계라도 좋다

어디엔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없을까

적이라도 상관없다

기 어려워도 좋다

그저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면

아아 오래토록 이를 좇느라 지친 마음


---


그것만 있으면, 자기 발밑의 어둡고 깊은 연못을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


백화점에 갈 때마다 갖고 싶은 게 늘었다. 그런 변화가 유코를 무척 불안하게 만들었다. 뭔가를 사도 다음에 가면 또 새로운 것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


이 세상,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괜찮아.


---


그때의 기분이란, 언젠가는 싫든 좋든 끝장이 나버릴 거라는 불안이었다. 무엇을 하든 소용없지 않은가,라는 절망이었다.


--



인간은 변해. 어떻게 보면 그것만큼 가혹한 사실도 없지.

하지만 변한다는 사실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봐.


--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밤늦도록 수다를 떠는 것도, 잠자코 있는 것도, 술 취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화해하는 것도 즐거웠다. 당연히 즐거워야 했다. 그런데 놀이는 놀이일 뿐, 늘 똑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 그날도 그런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떠들어댔는데 어느새 혼자가 되었고, 술 따위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 마시다가 이유 모를 자기혐오에 빠져버렸다.


--


매거진의 이전글 공연의 모든, 모든 구조를 다 알고 싶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