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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y 18. 2023

93. 약점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

약점을 공개했는데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무려 8년이나 걸렸는데! 사람은 역시 사람에게 관심 없어 아훗 신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하다. 내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까 이렇게 마음이 평화롭구나.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용서하라 하고 수용하라 하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구나~라고 동시에 깨달음.



2.

아 여기서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 없다"는 것도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왜 '사람을 믿지 마라'라고 하지만 또 동시에 '사람을 언제나 믿어라'라고 하잖습니까. 둘 다 같은 말이고 진리지만 전자와 후자는 의미와 가치관이 다르다는 차원에서.



3.

속 시원하다. 그런데 붕 뜨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고. 딱 내가 늘 원하던. 편안해. 평정심이 이런 건가.



4.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 - 누군가에게는 분명 "내 약점"이 약점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분명 "내 약점"이 약점으로 느껴지겠지. 우습게도 나는 결국 그 마지막 4%때문에 그동안 덜덜덜 떨었다는 게 된다. 고작 그 4%때문에. (4%라고 하는 이유는 세상에 소시오패스랑 사이코가 4%라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어서...)


만약 그걸로 당신이 나를 멀리하고 손절하고 싶다면 나 역시 대환영.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옆에 있으라고 이해해 달라고 설득하는 멍청한 짓은 더 이상 안합니다.(아 그동안 쓴 내 시간 내 돈 내 에너지 ㅠㅠ) 손절은 이제 나도 쉽다. 오히려 잘 됐다,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서. 아 좋다 기준점이 되네 오히려. 좋다 진짜.



5.

예전에 어디선가, 어떤 남자가 파혼하고 싶다면서 그 이유를 쓴 걸 누군가 퍼온 걸 읽은 적이 있다. 3년 넘게 연애했고 이제 결혼하려고 하는데 결혼하려고 보니까 사귀었던 여자 부모님이 장애가 있으셨다, 그걸 알고 나니 솔직히 결혼하기 싫다는 고백이었다. 빚도 없고 그동안 싸운 적도 없고 직장도 잘 다니고 성격도 좋고 자기 뒷바라지도 해줬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혼 약속 직전에 부모님 이야기를 알고 나니 파혼하고 싶다 솔직히, 하고 익명으로 올린 글인데 그 밑에 댓글들이 와...


약점을 공개했더니 사람을 버리냐 - 차라리 진짜 파혼해라 당신 같은 남자랑 결혼하는 그 여자가 아깝다 보내줘라 보내줘라라는 말이 거슬리면 그래 차라리 버려라라는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결혼은 어차피 일평생 좋은 일보다 힘들고 아픈 일들이 더 많고 결국 그런 일들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함께 해결하냐가 문제인데, 보니까 당신은 그동안 3년 넘게 당신 곁에 있던 여자를, 자기 일 잘하고 당신 뒷바라지도 하면서 부모님도 잘 모시고 살았던 그 여자를 결혼 직전에 "약점" 하나를 이야기한 걸로 한 번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당신은 애초 기본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너무나도 부족한 남자다- 여자가 아까우니 당신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게 보내줘라 라는 또 다른 어마무시한 익명 댓글들이 수십 개가 넘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들의 "약점"을 공개했을 때 곁에 끝까지 있었던 친구, 연인, 배우자 사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끝은 헤어져라, 보내줘라, 그래 헤어지라는 말도 보내주라는 말도 자존심 상하면(그 남자가 어지간히 자존심이 센 성격으로 글을 썼나 봐???) 차라리 "버려라" 그 여자분이 너무 아깝다라며 익명 세상에서 정치판도 아닌데 불붙은 이야기들을 보고 아아.. 그래. "약점"을 공개했는데 저렇게 나오는 친구/애인이라면 진짜 손절하는 게 맞다 느꼈다.




그래그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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