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밥 한번 먹자

언제부턴가 나에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참 어려운 말이 되었다.

by 허둥지둥

언제부턴가 나에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참 어려운 말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건 참으로 위험한 행위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무척 본능적인 행동이고, 밥 먹는 내 모습을 스스로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남에게 그대로 노출하게 된다는 점에서 묘한 불편함이 든다.


허기가 진 상태로 만나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무심코 쩝쩝 소리를 내거나 식탁 위에서 코를 푸는 등 남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식습관을 의도치 않게 드러낼 수도 있다. 반대로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이거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 음식을 휘적이며 입맛이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결국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맛있고 괜찮게 먹는 사람처럼 애쓰며 행동하게 된다.


어렵다. 누군가와 밥을 ‘잘’ 먹기 위해선 본디 식당 선택에 있어서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만나는 사람과 식성이 비슷해야 하고, 음식도 그럭저럭 맛이 있어야 한다. 관계의 친숙도 및 둘의 성향에 따라 어떤 카테고리에 속한 식당을 갈지도 중요하다. 지나치게 유명해서 웨이팅이 많은 식당을 선택할 경우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조건이 두 사람의 편한 이동범위 안에 들어와야 한다. 이 모든 수고를 다 감수하고 이루어지는 ‘밥 한 끼’는 나에게 실로 어마어마한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밥보다는 커피다.

어딜 가나 발에 치일 만큼 많은 카페들이 있고, 어지간한 곳에 가도 맛은 평타 이상이다. 커피를 마시며 “너무 맛이 없어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일은 드물다.(너무 비싸지 않은 카페를 간다는 전제하에서다.) 걱정된다면 프랜차이즈 카페를 가면 된다. (여기서 덧붙이자면,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은 확실히 다르게 봐야 한다. ‘밥 한번 먹자’하고 만난 상대와 xx 부대찌개, OO 햄버거집을 가는 일은 좀 드물지 않은가)

무엇보다 차를 마시는 시간에서 식사 예절이 과하게 드러날 일도 드물다. 컵을 들고, 내려놓고, 마시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이제 나에게는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무게보단 ‘커피 한잔 하자’의 가벼움이 좋다. 누군가에게 날것의 나를 보이며 관계가 깊어질 가능성을 주는 일, 그만큼의 시간과 태도를 내어주는 일이 점점 버겁다. 그래서 난 가볍게 만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커피 한잔 정도의 무게의 말만 던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택. 어쩌면 깊은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고 안전함 속에서 그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소심한 나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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