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변의의 두 번째 사랑 이야기
지금껏 제가 만나온 사람들과는 달라요. 그 사람은 말이죠. 별 볼일 없던 제가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게 된 건 다 그 사람 덕이예요. 사실 제가, 아마 지금의 저를 보고서는 그렇게 생각 못하시겠지만, 이십 대 중후반에 좀 많이 우울했었거든요? 거기서 저를 건져 올려준 게 바로 그 사람이에요. 왜 우울했냐 하면... 이렇게 말하면 좀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실 가지고 태어난 게 많아요.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부모님도 서로 화목한 편이시고 저와 동생을 넘치도록 사랑해 주셨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를 그럭저럭 잘해서 좋은 학교를 갔고요, 자연스럽게 좋은 직장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왠지 모르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단 게요.
근데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해요. 왜, 그런 표현 있잖아요. ‘단점이 없는 게 단점’이라는 말. 저에게는, 말하자면, 결핍의 결핍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왜 문제냐고요? 문제죠. 분명히 문제라니까요. 왜냐하면 결핍은 삶에 그 무엇보다도 강한 동기가 되어주거든요. 조금 과장해 보자면 결핍‘만’이 우리 삶에 동기를 부여해 주거든요. 하하... 표정을 보니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네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동물(動物),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 움직임이라는 게 어디로 움직이는 걸까요? 제 생각엔 물이 가까운 곳에 부족하거나 비어있거나 그런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흐르듯이, 사람도 흘러가는 것 같아요. 자기에게 돈이 없는 것 같으면 돈을 좇고, 인정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인정을 좇고, 정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식으로 말이에요. 근데,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아세요? 그럼 그냥 거기 멈춰버려요. 상어는 살아있는 동안 헤엄치지 않으면 죽는대요. 걔는 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해요. 아님 움직이기 위해 사는 거일 수도 있고요. 암튼, 사람도 그런 것 같아요. 움직일 곳이 없으면 죽고 싶어요. 공허하고, 우울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고.
그랬죠. 그랬어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도 그랬을 거예요. 아,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요. 참.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하자면, 제가 그 사람 말고 다른 남자를 안 만나본 건 아니에요. 오히려 보통의 시선으로는 그전 남자들이 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잘생기고, 매너 좋고, 저를 사랑해 주고. 근데 매번 똑같았어요. 상대가 다가올 때 정도에나 막연한 기대감과 낯섦에 설레지만, 결국엔 다 비슷한 결말을 맞더라고요. 제가 좋대요. 막 사랑한대요. 웃기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그 후로 남자들한테 별 기대는 없었어요. 제 인생을 구원할 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했죠.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냐고요? 제가 방금 거창하게 설명한 거에 비하면 만남 자체는 그리 특별하진 않았어요. 그냥 평범하게, 친구의 친구로. 술자리에서 만났고,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냥 어느새 눈길이 갔어요. 처음엔 단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근데 그 사람이 원체 특이한 사람이긴 해요. 한 번은 만날 때마다 몇 번씩 본인이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조각품 얘기를 막 신나서 해대길래,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나 궁금해서 사진을 봤거든요? 아니, 막 엄청 크고 멋진 건 아니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퀄리티가 있을 걸로 기대하잖아요. 핸드폰 카메라로, 심지어 나름 공들여 찍은 것 같았는데, 진짜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어요. 조잡함. 형태도 엉망이고, 완성도도 최악이었어요. 근데요. 웃긴 게 있죠. 그 모습이, 돛단배랑 피노키오를 자랑하는 바보 같고 모자란 모습이 그 사람의 모습이 제 마음속에 깊게 남았어요. 위안이 됐어요. 마음이 따뜻해지고, 이 띨띨한 인간한테 뭐든 해주고 싶고. 안쓰럽고. 애틋하고. 글쎄요. 그때부터였겠죠. 제 삶이 흐르기 시작한 건.
이제 저는 제가 다치거나 손해 보는 건 참아도 그 사람이 당하는 건 도저히 못 보겠어요. 막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당장 누구한테라도 따지고 싶고 그래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요. 뭘 해도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기는 스타일인데, 그 사람만 관련돼 있으면 또 다른 제가 튀어나와요. 이게 사랑 아닐까요? 또, 이게 진짜 제대로 된 인생 아닐까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충만한 느낌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릿속에 그날 뭘 해야 할지가 분명해요. 저녁에는 오늘 뭘 못했는지 혹은 잘했는지 돌이켜볼 수 있고요.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은 몰랐어요. 사랑, 해보셨어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상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뿐인, 그런 상황 말이에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사람의 입에 맛있는 걸 넣어주고 싶어서 막 미치겠는 게 요즘의 저예요. 그런 맹목이 안정감을 줘요.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어요.
네? 제 삶이요?
하하... 이게 제 삶인데요.
Editor. 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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