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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문제 있는 사람이 예술 하면 생기는 일

도덕성과 예술성, 위대함의 경계 <달과 6펜스>


실력이 탁월한 아티스트의 인성 논란, 요즘 들어 기사에서 꽤 자주 보이는 듯하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괜히 잘 듣던 노래도 별로인 것 같고, 듣기가 꺼려진다. 물론 판단은 개인의 몫이겠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주인장의 최애 소설 <달과 6펜스>를 읽다 보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노래만, 작품만 좋다면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일까?


도덕성이 결여된 예술가를 위대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여기 마흔이 되어서야 '예술'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찾은 사람이 있다. 이름은 찰스 스트릭랜드, 가정에 충실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증권 브로커라는 안정적인 직장까지 모든 게 갖추어진 삶을 살던 그는 갑자기 그 삶의 노선을 변경하기로 결정한다.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는 집념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본디 타인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듯, 갑작스러운 그의 결정은 가정에도, 직장에도, 그의 모든 인간관계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와주던 친구 스트로브를 어느 순간부터 무시로 일관해 버리고, 오히려 그의 아내 블란치를 취해버리고서, 나중에는 그녀를 자살로 몰아넣기까지 하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가 보인 이런 미친 행동은 '무언가에 씌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지경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에 매몰되어 있었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오직 예술만이 유일한 목표였으며, 다른 것은 모두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다른 것들에서는 전혀 중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 순간도 목표와 수단이 주객전도 되지 않는 그의 삶을 보면 우리는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자신의 태곳적 힘까지 쏟아부은 작품을 태우는 장면을 통해 그는 세속적인 시선으로부터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며 예술과 그림을 그리는 그 행위 자체를 사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가 여타의 세속적인 것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이, 우리가 주인공 스트릭랜드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스트릭랜드의 목표를 이루는 여정을 응원하기보다는 가정과 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는 그를 배은망덕한 인간,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의 죽음 이후 그가 그린 작품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업적과 예술에 대한 비범한 열정만으로 도덕적 해이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쉽게 이야기한다면 삶이 도덕적으로 온전하지 않았던 화가의 작품을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소설에서의 스트릭랜드와 그의 작품은 결국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지만, 현실의 우리도 같은 문제를 맞닥뜨릴 때, 똑같이 이야기해야 할까?

<타히티의 여인들> 폴 고갱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스트릭랜드를 위대한 화가로 분류한다. 그러나 독자들의 의견은 모두 다를 것이다. 분명 그의 결핍된 도덕성과 배려심 없는 모습들은 인간으로서 질타받아 마땅하다. 그의 작품을 보며 느끼는 윤리적 찜찜함을 덜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유의미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의지도 의도도 없는 순수한 예술이었다. 그의 인생 자체가 겉치레 하나 없는 삶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ditor.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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