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직장인 영화 리뷰 Vol.12
울음마저도 사치였던 1948년의 제주
작년 제주 조천읍에 소재한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우연히 방문해, ‘아이고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1954년 마을 청년 김석태의 장례식에서 노제의 일종인 ‘꽃놀임’ 의식을 학교 운동장에서 치르다가 생긴 사건에 대한 설명이었다. 1949년 1월 조천읍 북촌리 마을 주민 436명이 국군으로부터 집단학살 된 기억이 마을 청년의 장례식과 함께 되살아나 통곡의 ‘아이고’가 당시 마을 주민 전체에게 번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에 경찰은 마을 이장과 주요 인물을 연행해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낼 정도로 ‘제주 4.3’에 대한 시절의 분위기와 탄압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개인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이 많아 ‘제주 4.3’을 상대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고 사건’은 기념관에서 처음 알게 된 사건이라 충격이 컸다.
그리고 올해 영화를 알아보던 중 우연히 광교의 <경기인디시네마>를 알게 돼 작년 11월에 개봉한 <한란>을 보게 됐다. 개봉 당시 주연 배우 ‘김향기’ 씨의 연기력에 대한 호평을 소셜미디어에서 봐 궁금한 작품 중 하나였다. 영화는 우리나라가 ‘제주 4.3’이라는 인종청소에 얼마나 둔감했는지 마음 아리게 꼬집는 작품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일정 부분 하고 본 작품이었지만, 보는 내내 어떻게 ‘국가’와 ‘국군’이 ‘시민’을 단순히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봐야했다. 더 슬픈 건 영화 속 이야기는 ‘제주 4.3’의 이야기의 아주 일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로 김향기 배우의 ‘이 기막힌 일을 너랑 내가 잊어버리면 누가 알아줄까?’의 한 서린 대사가 위로와 답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는 국군의 대량 집단학살을 피함과 동시에 이미 빨치산 활동을 하는 남편 강이철(서영주 扮)을 찾기 위해 피난을 떠나는 아진(김향기 扮)이 자신의 딸 해생(김민채 扮)과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생을 할머니 계옥(강명주 扮)이 챙기며 노인과 어린이들은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며 아진을 산으로 올려 보낸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계옥은 노인과 어린이는 해치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명제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려준다. 계옥과 해생은 어제까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국군에게 총을 맞고 쓰러진다. 하지만 해생은 운이 좋게 총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원초적 본능이 여섯 살 아이에게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플롯이다. 자연스레 해생의 시각으로 ‘제주 4.3’을 관객이 지켜보게 되고 이 비극의 역사가 얼마나 깊고 슬픈지 실감하게 하는 연출이 된다.
영화 <한란>은 단순히 ‘제주 4.3’의 일부분을 다루지만, 관객에게 이 비극의 결이 얼마나 넓은지를 다양한 요소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 초반 계옥이 죽은 마을 주민 학살 장면에 ‘미군’을 등장시켜 ‘제주 4.3’에 대한 미군정의 개입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항쟁의 기폭제인 ‘빨치산’ 투쟁에 참여한 이들이 꿈꾸는 ‘좋은 세상’이 단순히 역설을 넘어서 또 다른 비극의 기폭제임을 강이철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제주 4.3’에서 제주 출신 국군도 희생됐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무엇보다 아진이 보여주는 ‘생존’에 대한 의지가 당시 제주도민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과감히 한국 영화의 클리셰를 포기하고 역사적 아픔을 강조하기 위한 영화의 결말도 더 무겁게 다가왔다. 특히 엔딩 크레딧 직전에 <제주 4.3 공원>의 ‘행방불명인 묘역’ 스케치를 통해 ‘제주 4.3’의 ‘집단 학살’이 단순한 숫자가 아닌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그리고 이를 우리나라가 간과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한란’은 제주 한라산 일대에 자생하는 난초라는 것을 이 영화를 검색하다가 알게 됐다.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한란>은 단순한 영화가 아닌 엄혹한 역사 앞에서 희생된 혼령에 대한 ‘위로제’였다. 영화에서 해생은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탓에 엄마 아진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지만 말을 잃어버린다. 더 슬픈 건 이런 실어증마저도 아진의 기력이 쇠하자 '살기 위해' 말을 다시 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함의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에 보여준 순진무구함과 초연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오묘한 표정은 영화가 끝난 뒤 오래 기억에 남는 연기가 됐다. 울음조차 사치였던 80여년 전의 제주를 떠올리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 아픈 역사를 우리 후손에게 정확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