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직장인 독서일기 Vol.19
미국의 민심을 읽다.
2026년 1월 3일, 전 세계는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 특수부대 작전으로 납치되는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월 28일 미국의 이란 폭격이 시작됐고 몇 시간 뒤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피살됐다는 뉴스를 보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전쟁이 곧 1달을 앞두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봉쇄됐고 덩달아 원유, 가스 등의 주요 에너지 해상 물류가 막혔다. 이란의 에너지 설비는 물론이고 주변 중동 국가의 유전을 비롯해 주요 생산 설비 등이 공격을 받았다. 제3차 석유파동은 현실이 됐고 이 피해의 규모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상태다. 혼돈 그 자체가 새로운 기준(New Normal)이 된 시대, 이 시대의 중심에는 미국 47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선거 외에도 전체 득표수도 이겨 재선에 성공한 사실은 기존 전문가 예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결과였다. 미국의 민심과 여론 파악에 전문가 집단은 다시 실패했고 당연히 세계는 이 대통령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됐고 당선 이후 미국 관련 뉴스는 예상 범위보다 더 심각해진 상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영향을 단순히 미국 본토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선거권과 상관없는 전 세계 시민들이 실감하는 단계가 됐다. 개인적으로 도대체 도널드 트럼프는 2번씩이나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도둑맞은 자부심>은 이 현상에 대한 일련의 단서를 주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저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U.C Berkeley 교수이자 사회학자다. 저자는 트럼프 1기 당선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직접 연구에 나섰다. 저자가 주목한 곳은 켄터키주 파이크빌(Pikeville, Kentucky)이었다. 이곳은 미국 하원의원 기준 켄터키주의 5선거구(KY5)로 백인 비율이 90%가 넘는 미국 내 선거구 중 가장 백인이 많은 선거구이자 2번째로 가난한 선거구다. 동시에 2017년 4월 30일 당시 미국에서 부상한 극우 세력이 ‘파이크빌 행진’을 진행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동네이기도 하다. 혹실드 교수는 이 지역에 직접 찾아가 ‘왜 저소득층 백인은 도널드 트럼프를 뽑았는가?’에 대해 묻고 답을 정리해 이번 책 <도둑맞은 자부심>을 출간했다.
혹실드 교수는 파이크빌을 찾아 다양한 주민을 인터뷰했다. 소수의 유색인종부터 ‘파이크빌 행진’을 기획한 지역 극우 세력의 리더를 직접 찾아가 ‘파이크빌 행진’과 ‘도널드 트럼프’ 그리고 그들의 삶을 묻고 기록했다.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주민들이 가진 수치심과 이를 회복하기 위해 ‘극우 이념’과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됐음을 주목한다. 과거 주력 산업인 석탄 광산업의 몰락으로 쇠락한 지역 경제 탓에 주민들도 빈곤층으로 전락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평범한 가정을 꿈꿨지만, 대다수 주민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멀게만 느껴지는 구호였다. 동시에 주민들이 경제적 불평등 대응 정책이 유색인종과 성소수자 등에 집중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음을 보고한다. 결국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바닥난 인종적 자부심’을 다시 채우는 이념이 필요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파이크빌이 속한 KY5 선거구는 저자의 인터뷰를 보자면 미국 빈곤 문제의 집약체였다. 주력 산업의 쇠퇴로 대다수 노동자가 실직했으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다. 동시에 남은 이들의 경우 진통제 오용에서 시작해 지독한 약물 중독에 시달릴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자연스레 지역의 범죄율은 올라갔다. 역설적이게도 주 정부 차원에서 민영화된 감옥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면서 수감률은 미국 평균을 웃돌고, 수용자를 게리맨더링에 활용해 정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자의 인터뷰에서 ‘극우 세력’에 동조하지 않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뽑은 지역 주민은 자신들의 처지가 ‘잊힌 느낌’, ‘보이지 않는 존재’로 느껴진다고 고백한다. 명백하게 사회적 약자가 됐지만 백인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하며 쇠퇴한 지역 경제 탓에 외면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토로한다. 파이크빌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은 미국의 러스트 벨트(Rust Belt)와 남부 지역의 강력한 트럼프 지지 세력에 대한 실체를 인지하게 된다. 이들 지역이 가진 ‘빈곤’이 만들어낸 ‘수치심’의 회복을 시스템이 아닌 인종과 혐오로 해결하려는 주민들이 상당수 있음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더 암담한 건 이러한 여론이 쉽게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들 지역 주민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고, 유일하게 선거의 ‘표’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슬픈 것은 고착화된 ‘레드 스테이트(Red State)’로만 남은 채 이들이 처한 생존을 위협하는 빈곤 문제는 해결되기 요원할 것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자부심은 인종이 아닌 경제지만, 미국 정치는 이들에게 감정의 해결책만 제공한다. 매일 기행을 펼치는 미국 대통령의 기저에 이러한 민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슬픈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