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올랐어요!

선택과 조합의 이야기

by 수수한

색깔을 너무 좋아한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색연필, 오일파스텔, 마커펜, 플러스펜, 물감, 털실뭉치들...

그렇다. 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볼 때마다 찔리는 것들. 하고 싶어서 이것들을 모은 건지, 색에 홀려서 하고 싶어진 건지 전후관계를 모르겠지만, 가지런한 색들의 진열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책을 읽다 보면 유난히 단어가 들어오는 글들이 있다. 이 단어를 이곳에 이런 식으로 쓰다니. 글이 예술로 보이는 순간이다. 그런 문장이 차고 넘치는 글을 만나면 읽기를 멈추고 육성으로 외친다.

"캬!"

이 작가는 예술가로구나.

고심해서 이 색을 올려보고, 저 색을 올려본 뒤 채색한 그림처럼, 그 문장에 가장 적합한 단어가 살포시 담겨 있다.


사실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만들어 내는 작품이 같은 것이 아니다. 흔한 색, 몇 가지 되지 않은 색으로도 고수는 도무지 따라 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마음이 위안이랄까, 부족한 실력을 물질로 어느 정도 커버하려는 심산이랄까. 72색과 132색 사이의 고민은 금액의 고민을 제외하면 언제나 마음으로는 132색의 편을 들어준다.

내가 육성으로 감탄한 그 문장들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아는 낱말들의 조합이다. 내가 뻔히 알고 있는 낱말인데, 뻔히 알고 있는 방법으로 쓰이지 않았으니 그 지점에서 예술로 등극한다.






얼마 전 꾸며주는 말을 사용해서 글을 쓰는 활동이 있었다.

Y 글의 제목은 '롯때월드'. 우리 Y는 롯때월드의 추억이 좋았는지 글을 쓰라고 하면 롯때월드와 롯때타워가 참 자주 등장한다. 글쓰기 활동으로 쓴 글은 맞춤법을 교정해주는데 웬일인지 롯때월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 Y는 늘 롯때월드라고 쓴다.


첫 줄을 보고 난 오늘 Y보다 좋은 문장을 쓰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잠실로 갔다. 내 마음이 우렁차게 소사 올랐다.

소사 올랐다니. 그것도 우렁차게라니.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우렁차게'와 '솟아올랐다'는 낱말을 붙여 써본 일이 없다. 물론 소사 올랐다고 쓴 일도 없다.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하므로 '소사 올랐다' 아래에 '솟아올랐다'라고 자그마하게 적었지만, 사실 너의 '소사 올랐다'를 응원했다. 너무나 순진무구하게 솟아 오른 너의 마음이 더 잘 느껴져서.



근대 갑자기 비가 후드득 떨어지더니 번개도 우르르 쾅쾅! 솓다져가주구 갈라고 했는대 갑자기 비가 그쳐가고 재미있고 신나개 다시 놀았다!

솓다져가주구는 뭐지...나는 '?'표시를 아래에 쓴 후, 눈으로만 보기에 생경한 그 단어를 입 안에 굴려 발음해본다. 솓.다.져.가.주.구.

아, 비가 쏟아져가지고?

중간중간 귀여운 맞춤법 실수가 보여주는 유쾌함과 통일성, 선생님이 그렇게 옆에 서서 강조해도 한결같은 너만의 한글 획순(선생님은 왜 글씨만 봐도 획순이 보이는 걸까... 내 눈이 잘못한 거지.)이 너의 한껏 신이 난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이 글에서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 몹쓸 만연체 문장이라니. 역시 오늘 나는 Y보다 잘 쓰기는 틀린 것이다.


(네. 내 아들이 아니니 이렇게 너그럽게 웃으며 글을 읽습니다. 그리고 Y를 알고 읽어서인지 귀여움이 글에 묻어 나와요. 그래도 열심히 알려줍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고칠 것은 고치는 거로)





검사하고 학습지를 돌려주면서,

"선생님 이 표현 너무 좋아!"라고 말하니

뭐 이런 걸 가지고? 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찡긋 눈웃음을 짓는다.




은유 작가의 글에서 읽었던가. 나도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세상 쉽고 간편한 단어로 툭 던지는 무책임한 쓰기를 줄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가진 낱말을 새롭게 배치하는 것을 시도해보련다. 물론 나는 하수니까 색을 모으는 것처럼 낱말을 잔뜩 모으는 것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하수는 장비 빨을 무시할 수 없으니!



Y야. 선생님은 네 글 덕분에 마음이 우렁차게 솟아올랐어!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런데 귀여워는 대체 가능한 낱말이 없다. 내게.

귀엽다. 증말.



*브런치의 맞춤법 검사기는 소사 올랐다와 솓다져가주구를 고치지 못합니다. 롯때월드는 의심만 하는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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