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수한 책

[수수한책]거인의 노트,나의 노트

by 수수한
자기 삶을 주관자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주입된 이상향. 그 이상행이 진짜 내 욕망일까?... 10년, 20년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면... 그때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힘들게 느껴지겠는가?


잘게 분업화된 일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 그 열심히 내가 원하는 열심인지, 나의 내면을 깎아 먹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건 아주 위험하다.


기록에 대한 책. 기록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와 그 방법을 담은 책이다.
나는 뒤편의 구체적인 방법론도 좋았지만, 앞부분의 '허망'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생각을 많이 했고, 지난주 그에 대한 그림일기도 그렸다.




국토대장정을 갔었다.

그날의 몫을 걸어내야 했다. 그래야 밤의 거처가 확보되었다. 날이 밝으면 다음 날의 몫을 걸어내야 했다. 그래야 새로운 밤의 거처가 확보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내었고 하루하루를 넘겨내었다. 그 하루가 모여 마지막 날이 왔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허망하였는가. 그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여름의 내가 걷지 않았다면 가을부터의 나는 다른 나였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분명 나에게 남은 것은 있다. '국토대장정에 다녀왔다'는 사실이다. 타인들은 내게서 들었지만 잊을 말이었고, 나조차도 잊고 살다가 문득 꺼내어 그랬었지 생각하고 다시 집어넣는 것.


하루의 거처를 위해 앞사람 뒤꿈치만 보고 걸었던 뜨거운 아스팔트 기운이 문득 생각났다. 왜 왔는지, 여기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는 종종 잊혔다. 다리는 무거웠고 더웠고 힘겨워서 "이제 거의 다 왔다."라는 선발대의 반복된 거짓말이 진실이기만을 바랬고, 저녁시간을 고대하는 날들을 여름의 반으로 채웠다.


여름의 반.

그날의 저녁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도 될만한 길이의 시간이다.

그러나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걸었는데 삶의 끝자락에 문득 멈춰 섰을 때 여기가 내가 오고 싶어 했던 곳인가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를 그려보니 섬뜩해졌다. 종종 고개를 들자는 것이 이 책에서 만난 '허무'라는 단어를 읽고 궁리했던 어설픈 결론이었다.



책은 공부, 대화, 생각, 일상, 일 이렇게 5 분야에서 기록을 권하며 각 분야의 기록 방법을 소개한다. 시도해보고 싶은 여러 꼭지들이 있고 이 중 몇 가지는 소박하게 시도 중이다.

아마 내 독서노트를 보면 김익한 교수님은 혀를 차실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왜냐하면 교수님은 '요약'을 강조하시기 때문이다. 절대 길게 쓰지 말아라. 다 읽고 듣고 배우고 나서 기억나는 것만 짧게 쓰라고 강조하신다.

그러나 독서노트만큼은 계속 이렇게 적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뿐만 아니라 문장을 손상시키지 않고 곱게 건져 올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 단어와 조사, 어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울림은 간단한 요약으로는 담을 수 없다. 내 독서노트 기록의 목적은 기억이 아니기에 이미 쓰는 동안 그 목적의 상당 부분을 달성한다. 이는 생각을 수집하느냐, 문장을 수집하느냐의 차이에서 올 것 같다. 부지런히 읽고 짧게 요약한 뒤 새로운 책으로 옮겨가는 효율적인 독서와는 요원하다. 나의 독서는.


기록의 힘에 대한 이야기는 동감한다. 얼마 전 큰 꼬마가 말했다.

"엄마, 조금 있으면 그림일기 쓴 지 1년 다 되어가네?"

그림일기와 함께 토막글을 함께 끄적였으니 미천한 그림과 글을 매일 쓴 지 1년 즈음이다. 이런 어설픈 기록도 허무를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작년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쓸데없는 짓일까? 그림일기 그리는 것. 시간이 아깝잖아."

나의 작은 꼬마의 대답

"왜? 일기 쓰는 건데."

쓸데없지 않네.

그날의 대화가 내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서 책 파우치를 검은색 펜으로 그리며 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아, 교수님 말씀대로 이 책에 대한 짧은 요약으로 마무리하자면

요약, 자기화, 핵심만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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