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네임 사냥기
조그마한 일이지만 세상 어려운 일에 대하여.
저는 닉네임이나 아이디 짓는 것이 그렇게 어렵더라고요.
요즘은 liiiliililil 이런 아이디도 보이던데, 바코드 모양을 연상시켜 자신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닉네임이라고 해서 무릎을 탁 쳤어요. 와. 이런 창의적인 사람이 있나. 이것을 제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생각해낸 처음의 누군가가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이의 아이디를 보고 한 명, 또 한 명이 따라며 일파만파 퍼졌을 텐데 어쨌든 처음 만든 이와 처음 쓴 그날이 있기는 있지 않았겠어요?
이게 특허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처음 생각해낸 그 이는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이거 내 아이디어인데 말이야. 하면서요. 그런데 과연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이쪽 한편에서 쓰기 시작했을 그 무렵, 저쪽 한편에서 간발의 차로 먼저 쓰기 시작한 누군가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진실이야 있겠지마는 제가 처음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요. 혼자 가슴속에 자신이 처음이라 자부심 품고 착각하며 사는 수밖에요. 이렇든 저렇든 그게 뭐 어쨌다구요. 정작 생각한 이는 아무 생각 없는데 제가 별것도 아닌 일에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렇지만 만약 저라면 쿨하게 아무 생각 없을 일은 없고 옆에 누구에게라도 말할 것 같은데 말이죠.)
앞에 딱 한 문장을 던져놓고 너무 샛길로 샜네요. 다시 한번 옮겨 적어볼게요.
네, 저는 닉네임이나 아이디 짓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요. 처음 지은 아이디는 한메일 주소였어요. 그때는 몰랐죠. 20년도 훨씬 전에 시절 아이디를 주야장천 여기저기에 쓸 줄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고심해서 지었을 것을. 사실 고심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어요. 나름 고심해서 지었겠죠. 무려 '첫' 이메일인걸요. 다만 고심해서 지은 것이 이 모양이었을 뿐요.
저의 첫 아이디는 제 실명을 약간 귀엽게 변형해서 친구가 불러주곤 했는데 그것을 영어 철자로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호칭도 아니고 써놓고 눈으로 보거나 입에 담고 불러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도 않는, 어떻게 보면 좀 투박한 닉네임입니다. 실명과 유사하지만 실명과의 유사성은 제 실명은 아는 이만 알 수 있다는 사실. 여하튼 그렇습니다.
이때 숫자를 섞으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너무 짧아서 글자 수를 맞추라고 했을까요. 나름 좋아하는 숫자라며 영문 뒤에 7을 붙였습니다. 이 애칭은 아이디로 삼기에 좀 짧은 감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요. 어느 사이트에서는 이 아이디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곧 알았습니다. 그 때라도 제대로 된 다른 아이디를 지었을 것을요. 전 왜 이리 안일했던 걸까요. 그때 지었다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인터넷인들보다 앞서 제가 괜찮은 아이디를 선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저는 너무나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 애칭 뒤에 생일을 의미하는 숫자 4 개를 덧붙입니다. 역시 시작과 관련된 온갖 종류의 속담과 격언들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그 이후 쇼핑몰, 도서관,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는 이 첫 아이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름과 생일의 조합이라니. 이것보다 더 제 신분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이 없겠네요.
그러나 때때로 한글 닉네임을 요구하는 공간이 있곤 하죠. 모래밭에 한 알의 모래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카페나 밴드,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을 때는 제일 흔한 닉네임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봅니다. 과일 이름이나 달빛소리, 소중한 하루.. 뭐 이런 어디서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요. 나 조차도 내가 뭐라고 지었는지 모를만한 닉네임을 말이죠.
그러나 내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공간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가령 블로그, 인스타나 브런치 같은 곳 말이에요. 좀 좋은 이름이겠다 싶어 검색해보면 사람 생각은 거기서 거기인지, 아니면 내 창의력의 한계인지 이미 선점한 이들이 있네요. 재빠른 사람들! 내 것을 빼앗긴 것처럼 어째 좀 분하네요. 그렇다고 그 뒤에 7이나 생일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아요. 그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이 지점에서 고민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정할까.
내 정체성을 나타내고 싶은데, 나인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닉네임은 무엇일까.
이게 웬 변태 같은 소리인가요. 네. 저란 사람은 그렇습니다.
관심받기 싫어하지만 관심받고 싶어 하는, 나인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좀 많이 봐주었으면 하는.
저는 삐약삐약 인스타 꿈나무인데요. 저도 이렇게 인스타에 재미를 붙이게 될 줄 몰랐네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참 카카오스토리 열풍이 부는 그 시절은 물론 몇 년간을 카톡도 안 깔아서 스마트폰 없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주변인들이 많았던 사람인데요.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인스타 재미가 들렸어요. 사실 처음에는 인스타를 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짝만 고심을 하고 주소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타 주소는 쓰던 대로 두었지만 괜찮은 닉네임이라도 하나 가지고 싶었습니다. 브런치도 시작했으니 마침 이름이 또 필요하고요.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한 저는 또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래서 시작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운명이로군요. 아이들 이름 정말 잘 지어야 합니다.
네. 제 이름에 '수'자가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수를 두 번 넣었어요. 수수. 와 이렇게 단순할 수가.
소확행, 소소하다는 귀엽고 정다운 말은 참 많이 쓰지요. 수수는 왠지 모르게 좀 투박하고 촌스럽고 구수한 느낌이 물씬 풍기긴 해요.
그런데 이 수수라도 써볼라 쳐보니 흔하디 흔하게 너무 많고, 여기저기 이미 사용한 별명이라고 하니 쓸 수가 없네요. 그래서 홧김에 '한'이라는 글자를 하나 더 붙여버렸어요. '수수한'은 별로 없네요? 형용사이니 미완의 느낌의 물씬 풍겨서 그런가 봐요. 남이 그다지 쓰고 싶어 할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면서 얼른 등록을 해버립니다.
그 뒤 열심히 수수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탐낸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수수한책 #수수한브런치 #수수한순간 #수수한요가 #수수한그림...
사부작 해시태그를 써가면서요.
또 제가 한결같은 사람이 아닌지라 어쩔 때는 쓰고 어쩔 때는 쓰지 않고 그렇습니다만.
오늘은 홧김에 지어버린 제 닉네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미 아는 낱말이지만 사전의 풀이는 또 새롭게 다가오니까요.
수수한
형용사
1. 물건의 품질이나 겉모양, 또는 사람의 옷차림 따위가 그리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제격에 어울리는 품이 어지간하다.
2. 사람의 성질이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까다롭지 않아 수월하고 무던하다.
오. 뜻이 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저랑 닮은 면도 있네요.
제가 이것저것 벌리고 해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것을 뛰어나게 잘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어설픈 인간이거든요. 엄청 뛰어나면 좋겠지만 사실 '그리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 이것도 정말 어려운 일 아닌가요?
2번 뜻에는 엄청 찬사가 쏟아져 나오네요.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 옳지. 까다롭지 않다. 옳거니! 수월하고 무던하다. 좋구나!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까다롭지 않아 수월하고 무던한' 사람까지만 되어도 제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 생각이 드는군요.
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고 봤는데.
에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실 마음에 쏙 드는 닉네임은 아니지만 당분간 방황을 멈추고 이 아이에게 정을 붙여 보려고 합니다.
간간히 닉네임 사냥은 계속되겠지만요.
오늘도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까다롭지 않아 수월하고 무던한 하루를 살아보려 애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