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일어났던 순간과 그리던 순간 모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일의 기록이니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법한 일인데, 그리던 순간이 기억이 나는 것은 의외다. 어디에서 그렸는지 떠오르고 때로는 누가 곁에 있었는지,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하루 중 언제였는지, 무엇을 마시고 있었는지 따위도 생각난다.
그러니까 적어도 하루에 두어 순간들 정도는 이 일기장을 들추어보면 기억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소리이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묻는다면 뭐대단하게 이익이 되는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날이 그날 같게 뭉텅이로 지나간 것 같은 감정으로 12월을 맞이하는 이 순간에,
또 그날이 그날 같을 것 같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심정에서 어느 정도 나의 마음을 보호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날이 그날인 줄 알았는데 모두 다른 페이지들을 채운 뭉치가 물리적으로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나는 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
나의 날들은 모두 같은 날들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도 그렇겠구나.
인스타그램에도, 브런치에도 매일의 그림과 짧은 토막글을 동시에 올렸다가 같은 글을 나누어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싶어 브런치는 한동안 들르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