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넓고 긴 골목길이었다. 검은 아스팔트의 열기가 종아리에 그대로 느껴질 만큼 뜨거운 날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늘어지는 여름 낮을 지나고 있었다. 어린이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디로 갈지, 이 길은 언제 끝날지 고민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지친다고 칭얼거릴 수도 있었다. 나의 손 끝에는 그것들을 다 받아줄 엄마의 손이 있었으니까.
골목길의 폭이 다소 넓게 느껴진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골목의 한쪽 끝에 다**학교의 아이가 비뚤비뚤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갈색의 큰 건물이 있었다. 다**학교라는 이름의 특수학교였다. 그 앞을 지나는 것은 왠지 께름칙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갈 때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걷곤 했다. 그 건물 바로 앞을 지나고 싶지 않아 미리 찻길을 건널 때도 있었고 반대로 나중에 찻길을 건널 때도 있었다.
우리 동네와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큰 욕 중에 하나는 “너 다** 아니야?”였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도 모른 채 손쉽게 썼고, 모두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고,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면 크게 화를 낼만한 일이었다.
우리 학교 어린이들에게는 그것은 정말 화낼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호자가 없는 다**학교 아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보다는 한 두 살 더 많아 보였다.
친구들과는 서슴없이 그 학교 이름을 입에 올렸던 나도 막상 골목길에서 그 학교 아이를 만나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위태위태한 그 아이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나의 손 끝에 엄마의 손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뒤편에 가서 정말 다행이다. 조금만 더 늦춰 걸으면 될 일이니.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으려 했으나 그 아이와 우리의 간격이 좁혀질수록 조마조마했다. 그 아이의 걸음걸이는 매우 불안정했고, 느렸다.
골목길은 길었고 길 위에는 엄마와 나, 그 아이 이렇게 셋 뿐이었다. 그 아이를 보지 않은 척했지만 내 눈은 자꾸 그 아이의 등을 좇았다.
그러다 그 아이의 가방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아이는 떨어진 것도 모르는 채 제 갈 길을 열심히 나아갔다.
아이가 떨어뜨린 것은 나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탐구생활'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면 숙제로 받아왔던 책 탐구생활. 탐구생활을 저 아이도 받는다고? 다**학교 아이들도 저 탐구생활로 공부를 한다고?
두려움을 잊은 채 충격과 놀람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어지던 엄마의 말이었다.
“아가. 책 떨어졌어.”
그 뒤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그 아이 가방에 책을 넣어주었는지, 아니면 그 아이 스스로 책을 주워 가방에 넣었는지, 그리고 그 아이는 앞서 걸어갔는지, 그 아이의 느린 걸음 뒤로 우리가 앞섰는지 도저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엄마가 말한 “아가”의 온도였다.
엄마는 나에게 종종 그렇게 부르곤 했다. 엄마가 아가라고 부르면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이미 아가라는 말을 듣기에 훌쩍 자란 국민학생이었는데도 엄마는 때때로 무방비상태에서 아가라고 나를 부르곤 했다.
이를테면 "아가, 이것 좀 먹어." "아가, 창문 좀 닫아줄래?"
엄마의 작은 아가가 된 것이 좋았고 그 말은 나를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말은 더없이 따뜻했고, 다정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아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정말 따듯함을 듬뿍 담았을 때 나직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었다.
세상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 엄마밖에 없었고, 우리 엄마가 그렇게 부를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그 온도로 나지막이 그 아이를 불렀다.
“얘.”가 아니라 “아가”라고 불렀다.
'아'가 낮고 '가'가 더 높았던 아가로.
지금도 때때로
그 뜨거운 아스팔트 길과 비틀거리는 아이의 뒷모습과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순간에 주저 없이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던 엄마가 그 아이를 “아가”라고 불러주어서 좋았다.
고맙다.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눈물이 핑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