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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Jul 30. 2020

싸움의 기술 – 새롭게 이야기하기

하마글방 7기 무니의 글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 하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활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에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했다. 현대의 사람들은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책으로, 신문으로, 인터넷 상의 글로, 그리고 영화와 음악으로도. 우리의 사방은 이야기로 둘러싸여있다. 우리는 이렇게 쏟아지는 이야기들 중의 일부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해서 골라 듣는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새기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들은 우리 삶의 참조점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면 나의 삶도 그와 닮게 변화시키고 싶어지는 욕구가 인다. 이야기의 힘은 그렇게 크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균등하게 선택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쉽게 온 세상에 잘 들리고, 어떤 이야기는 거기에 집중하는 아주 소수에게만 겨우 들린다. 그것은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정상’과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이야기는 ‘비정상’, ‘비논리’로 폄하 된다. 어떤 이야기는 권력과 지위, 유명세라는 확성기를 타고 쉽게 증폭된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핏대 높여 말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 닿지 못한다. 


    후자의 이야기는 목소리의 크기로 절대 전자의 이야기를 이길 수 없다. 대신 그들의 이야기는 더 밀도 있고 응축되어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사회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 뭔가 아둥바둥 하는 사람들, 어느 하나라도 쉬운 일이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속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삶이 너무 불행해서 불행의 원인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이야기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대안을 발견하곤 한다. 사회의 논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사는 것이 너무 버거운 사람들, 혹은 그 논리로는 미처 설명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좋든 싫든 더 많이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대부분 발화되지 못하고 그저 개개인의 속에서 ‘발효’되거나, 발화되더라도 주변부에서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과 SNS의 발달에 힘입어 이야기를 좀 더 손쉽게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이 시대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터넷 상의 수많은 루트를 통한 글로, 출판사 없이 자신이 펴내는 책으로, 웹툰으로, 영상으로. 이 이야기들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분명 소수이지만 이런 이야기로 묶인 사람들에게는 좀 더 강한 유대가 존재한다. 서로의 삶을 공유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공유하는 묘한 유대감과 연대가 있다.


    이런 주체적이고 대안적인 이야기 생산의 가장 21세기적이고 민주적인 버전은 ‘메일링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쓴 글을 정기적으로 구독자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하는 서비스. 어떠한 중간 매체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여과없이 펼칠 수 있다. 물론 돈 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구독자를 모으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테지만, 어떠한 권위도 ‘자격’도 없이 이야기의 힘만으로 메일링 서비스를 성공시킨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일간 이슬아>. 아무도 청탁하지 않았지만 무려 매일 한 편씩의 글을 이메일로 발송하는, 메일링 서비스의 시초가 된 시도이다. 


    이슬아의 글은 다채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며 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글에 등장시킨다. 또는 모르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고, 일주일에 한 편은 친구들이 쓴 글을 대신 소개한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플랫폼화'하여 우리에게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이슬아의 글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소소하고 시시콜콜하다. 자신과 부모가 생계유지를 위해 해왔고 하고 있는 다양한 노동들,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 애인과의 관계,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어렸을 때의 기억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노동과 계급, 젠더와 평등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전에는 ‘이야기화’할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두가 메일링 서비스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가슴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권위나 자격은 필요하지 않다. SNS 상의 짧은 글로, 브런치에 올리는 긴 글로, 어딘가에 이어나가는 연재로, 함께 모여 발간하는 잡지로, 공개하지 않아도 서로 모여 나누는 이야기들로… 우리 안에서 발효되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자. 아무런 ‘자격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여전히 소수에게만 가 닿겠지만,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할 때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의 힘이 무서운 이유는 한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오고 서로 연결되어 세상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미약하게나마 시작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지원해주자. 그리고 때가 되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볼 용기를 가지자.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우리의 평범하고 자질구레한 삶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때 새로운 세상을 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글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힘입어 쓰게 되었다. 그는 이슬아 작가의 글에 간간히 등장하는 그의 글 스승이고 ‘어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도 메일링서비스를 진행중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어 구독 중인데 (이슬아의 이야기가 나를 어딘의 이야기로 데려다 준 셈이다), <대이야기의 시대를 열며> 라는 제목을 달고 발송된 이번주의 글은 양다솔이라는 흥미로운 사람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쓰인 글이었다. 양다솔은 주변의 권유로 갑자기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게 됐고 생각보다 훨씬 큰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자신의 일상의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경험들을 무대 위에서 털어놓으면서 그 이야기가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라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도 스탠드업을 할 예정이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 시대 ‘이야기의 힘’을 정성스레 이야기하는 어딘의 글 모든 면면이 좋았지만 가장 마음에 남은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야기를 알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피엔스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딜레마. 그러므로 혁명은 이야기와 함께 온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이야기다. 천지를 뒤엎는 것은 이야기 먼지로 시작된다.”


작가 무니

미약하지만 꾸준하게 쓰기.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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