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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Nov 12. 2020

카카오맛 로맨스 판타지

하마글방 10기 리니어의 글

 대여섯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가고 있다. 그날그날 끌리는 장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칼에 벼린듯 적확한 표현의 평론에 홀리고 어떤 날은 디스토피아 향기가 물씬 풍기는 SF 가 좋다. 남성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고 온전히 여성 서사에 빠져 들고픈 밤도 있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비밀스러운 본론인데, 클리셰 범벅의 이세계 환생 여주물이 재밌는 날도 있다. 최근엔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 이라는 웹소설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사실 악녀나 공녀, 황비, 대공 등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면 이런 류의 로판은 끝도 없이 나온다. 나는 이걸 카카오페이지[1] 풍의 로맨스 판타지, 줄여서 카카오맛 로판으로 부르기로 했다. 주로 지난 밤을 야근으로 불태운 다음 느지막히 눈 뜬 토요일 오전이 카카오맛 로판을 즐기기 최적의 타이밍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일주일간 카카오페이지에서 보낸 광고 알림을 넘기다 보면 혹하는 그림체가 하나쯤은 있다. 거기다 대개 처음 몇 편만 무료로 풀려 있고 딱 흥미진진해지는 시점에서 유료로 잠겨있는데, 이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면 침대에 누워서 몇만원 쓰는 건 순식간이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그리고 쓰는데 족히 몇 개월, 혹은 일 년 넘게 소진하셨겠지만 누운 자리에서 스크롤 넘기며 읽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하니까. 


 예나 지금이나 로판을 좋아한단 고백은 꺼내기 쉽지 않다. 제목들도 하나같이 진입장벽이 높다. '악녀는 두 번 산다',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버림 받은 황비',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등등 이 장르에 익숙한 사람은 그러려니 해도 잘 모르는 사람은 제목에서부터 온몸이 오그라들 것이다. 너 요즘 그런 거 보니? 하는 경악을 듣기 딱 좋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든 초반부 몇 화를 읽어보면 꼭 예언자가 된듯 캐릭터들의 향후 행보가 눈에 훤히 보인다. 얘는 여자 주인공한테 싸가지 없게 굴지만 나중엔 사랑에 빠질 거고 얜 주인공이랑 친구 사이인 척 하지만 나중엔 짝사랑 하겠지? 그럼 그 예측은 대체로 맞아들어간다. 로판을 비롯한 장르소설의 경우, 그 장르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작품에 원하는 바가 뚜렷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클리셰로 구성되는 탓이다. 주인공이 악행을 저지르며 살다가 죽음을 맞고 다시 과거로 회귀해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회귀물, 책을 열심히 읽던 어느날 책 속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책빙의물,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세계의 인물이 되었다는 환생물, 흔히 '회빙환'이라고 줄여 부르는 이 셋은 로판 장르의 정해진 공식과도 같다. 작품의 주인공은 99% 확률로 여성이며 이 주인공은 세계관 속 다른 여성들에 비해 능력이 출중하다. (보통 회빙환 설정에서 그 개연성을 채운다.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다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늘 영민하고 재치있고 똑똑하지만, 가장 극적인 위기에서는 남성 캐릭터의 무력과 권력에 기대고 헤테로 로맨스로 빠진다. 그리고 한치 결점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평일의 나는 그 모습이 영 못마땅하다. 바로 그 뻔하디 뻔한 헤테로 로맨스를 보고 싶어서 결제를 쏟아붓는 또다른 내가 매주 토요일마다 어김없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데도. 


 과거를 돌이켜 보면 예전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유리가면 [2]을 스무 번 넘게 빌려 읽으며 기타지마 마야와 하야미 마스미의 로맨스를 투게더 아이스크림처럼 퍼먹었다. 중학교 땐 시립 도서관의 어린이 자료실에서 밍크[3]와 파티[4]를 읽다가 감시차 방문한 엄마에게 걸려서 공포의 아이컨택을 한 기억이 숱하다. 어렸을 땐 그게 꽤나 억울했는데, 내가 로판에 발을 들인 건 엄마가 대여점에서 빌려온 소설을 몰래 읽은 것이 시초였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엔 '왕가의 문장'[5]에 - 생각해보면 이세계물의 조상님 같은 작품이 아닌가 - 고등학교 땐 하이틴 로맨스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다던 엄마는 로맨스 소설을 고르는 취향이 꽤 괜찮았다. 비록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흰 표지에 단풍잎이 몇 개 그려져 있던 그 소설책엔 한 번 읽고 나면 좀처럼 잊기 힘든 묘사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조기 교육을 받은 나 역시, 관심 없는 척 유치해서 못 보겠는 척 하여간 온갖 척은 다했지만 로판에 대한 욕망은 거부하지 못했다. 카카오페이지 앱의 구매 기록을 봐도 그렇고 넷플릭스의 추천 목록을 봐도 그렇다.


 로판을 낮잡아 보는 게 내 내면의 명예남성에 의한 선입견이란 걸 안다. 세상엔 내 취향인 것과 아닌 것이 있을 뿐 '유치해서 못 봐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따위의 구분은 없다는 것. 주로 웹소설 형태로 소비되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 주가 되는 것 역시 로판의 특징 중 하나일 뿐 로판을 무시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도. 그걸 다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바깥에서 스마트폰 어플을 열어 찬란한 그림체의 로판을 보고 있으면 스크롤 내리는 속도가 한없이 빨라진다. 중학생 때 어린이 도서관에서 만화 잡지를 볼 때도 옆에 있는 초등학생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던 걸 생각하면 이 부끄러움은 역사가 깊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웹툰 서비스를 만드는 게 내 일이니 회사에서 만화를 보는 건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일이고, 또 로판은 요즘 가장 매출이 높은 장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보는 건 어쩐지 회사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로판에 대한 애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작품의 내용이 나의 평소 가치관에 위배될 때 내가 겪는 자기모순이다. 로판을 읽다 보면 '이것이 옳다'와 '이것이 나의 취향이다' 사이에 다소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페미니스트 이지만 페미니즘과 충돌하는 듯한 작품을 현금 펑펑 써가며 보기도 하고, 윤리적인 시각으론 절대 응원하면 안되는 로맨스를 응원할 때도 있다. 또 많은 로판 작품들이 가상의 제국과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며 신분이 낮은 악역을 더 높은 지위의 주인공이 권위로 짓밟는 걸 '사이다' 서사로 보여주는데 이는 영락없는 제국주의 미화다. 로판이라는 장르 전체가 제국주의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상투적인 재미가 있는지라.. 너무 대놓고 소비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매번 비판적으로 읽으려 노력하는걸? 그런 자기합리화를 해가며 살금살금 읽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 개인의 영역이니 문제가 될 소지도 적다. 그런데 가끔 창작자에게 비난의 역풍이 불면 고민이 깊어진다. '빻았다'[6]는 말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그 말 한마디만 붙으면 어떤 비난이든 할 수 있게 된 탓에 창작자에게 검열되지 않은 비난이 자꾸 쏟아진다. 그건 내게 보내는 비난이 아닌데도 내가 맞은 것처럼 아프다. 그래서 소비자 된 입장에서 창작자를 변호하고 싶어지지만, 한편으론 나의 팬심이 누군가에게 또다른 가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다. 돌고 돌아 결국은 침묵을 유지하게 된다.


 삶 전체에 걸쳐 축적된 취향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의 취향 중 어디까지 드러내고 숨길 것인지, 또 어디까지 입을 열고 어디서 함구할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정해진 답은 없고 싸울 일만 많다는 점에서 참 어려운 과제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건 이 고민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로판 장르의 웹소설, 웹툰 뿐만 아니라 그간 온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서브컬처가 많기 때문이다. 주목받지 못한 탓에 적절한 시기에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고, 토론 없이 성장한 탓에 많은 문제가 있었으며, 소비자들 역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채 소비해 왔다. 그랬던 시간이 길다. 이제 그 업보를 청산할 때가 된 것이다. 홀로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버겁게 느껴지지만 로판과 서브컬처를 아끼는 사람들과의 연대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힘이 난다.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생계 사정, 기나긴 시간 로판 장르가 걸어온 변천사, 여성들의 내밀한 욕망, 스마트폰 세대의 소비 성향 등등 우리가 건전하게 나눌 수 있는 대화 소재가 얼마나 많은데. 비록 취향은 달라도 로판에 대한 팬심이 같다면 그 팬심을 담보로 휴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디 그 겁나는 '빻았다' 딱지는 내려놓고 서로의 입장을 차근차근 얘기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사회의 인식도 내부의 갈등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의 순정 만화에 비하면 지금의 로판은 훨씬 가시화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늘 꿈꾼다.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만을 남겨놓으려는 극단주의와 거기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한 우리의 작은 욕망,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여 만들어진 눈부시도록 달콤한 카카오맛을 앞으로도 계속 누릴 수 있기를.


[1] 카카오에서 제공하는 웹툰/웹소설 플랫폼. 점유율을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웹소설 플랫폼 계의 강자를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다.

[2] 1976년부터 연재되어 2020년 현재까지 완결이 나지 않은 순정만화. 주인공 기타지마 마야와 그 라이벌인 히메가와 아유미가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 경합을 벌이는 게 주된 내용이며, 연재기간이 길어진 탓에 엄마와 딸이 함께 보는 순정만화 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순정만화 계의 대작이자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지만 옛날 만화라는 걸 감안하고 봐야 하는 지점들이 많다. 가령 필자는 어릴 적 하야미 마스미와 주인공 마야의 로맨스를 좋아했다고 썼으나, 이 둘은 처음 만난 시점에 20대 성인 남성과 여중생 이었다.

[3]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문화사에서 발간되었던 월간 순정만화 잡지.

[4] 1997년부터 지금까지 학산문화사에서 발간되고 있는 월간 순정만화 잡지.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party_land

[5] 1976년부터 연재되어 역시 2020년 현재까지 완결이 나지 않은 순정만화. 21세기에 살던 미국인 소녀 캐롤이 고고학 연구를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모종의 이유로 타임슬립을 해서 고대 이집트에서 살게 되며 겪는 일들이 주된 내용이다.

[6]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뜻의 은어



작가 리니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서브컬처와 장르문학을 좋아합니다. 여성을 비롯한 비주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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