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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Nov 24. 2020

청소라는 벌

하마글방 12기 수부의 글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미끈한 흰 덩어리의 왁스를 납작한 막대로 조금 덜어내어 마룻바닥에 훅 던진다. 일 분단 아이들이 빗자루로 먼지 뭉치와 종잇조각과 과자봉지 같은 걸 치우고 나면 나를 포함한 이 분단 아이들은 밀대를 들고 거친 나무 마루에 윤을 낸다. 이 분단 아이 중에서도 나는 매끈함이 부족한 자리를 찾아 왁스를 떨어뜨리는 일을 맡았다. 여기 여기! 각자의 밀대가 지나갈 자리를 가리키면 나는 거기에 왁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장난스럽게 이미 미끄덩거리는 자리를 가리키며 여기라고 외치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같이 아 뭐야 으흐흐 하고 웃어버리는 식이다. 손걸레로 창틀을 닦는 아이, 의자를 밟고 올라서 커튼을 걷어내는 아이, 분필 가루가 날리는 칠판 주변을 정리하는 아이, 선풍기를 분리해 먼지를 씻어내는 아이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청소를 한다. 내 손가락 끝이 미끈거리는 게 조금 거슬리지만 밀대를 밀어도, 걸레를 빨아도 다 조금씩 불편할 것이다. 옷에 쓱 문질러 손을 닦아내며 두리번거리는 사이, 함께 시작한 청소는 함께 끝났다. 이제 방학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귀찮아도 조금은 즐겁던 청소에 대한 인상이 미묘한 거부감으로 바뀐 게 언제였을까? 얼마전 네살 아이에게 동생을 괴롭힌 날이니 동생 방까지 다 치우라고 벌을 주다가 발견한 질문이다. 아이가 '벌'이 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음…. 벌은 잘못한 사람이 받는 뭐 그런 거지…? 단어의 뜻을 아이가 질문할 때마다 내가 잘 모르는 단어들로 이뤄진 말만 하고 있다는 자각에 난감해지곤 한다. 청소와 벌. 이번에는 그 난감함이 해결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학교 청소시간이 떠올랐다.


중학교 교실 바닥은 나무 마루가 아니라 시멘트에 돌을 넣어 시공한 후 연마한 도끼다시 바닥이었다.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총 3층짜리 건물 각층 계단 사이에 있는 화장실 안에는 거울과 세면대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나무문이 두 개씩 총 네 칸 있었다. 그 안에는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보는 일본식 대변기가 하나씩이다. 낡은 타일 바닥에는 영영 지워지지 않을 얼룩들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두가 피하는 학교 내의 공간에 관한 선생님들의 대처는 일관적이었다. 지각한 아이, 선도부장에게 복장 위반으로 잡힌 아이, 쪽지 시험을 가장 못 본 아이, 복도에서 떠들거나 수업 시간에 졸다가 걸린 아이들이 벌로 하루 혹은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청소라는 벌. 청소는 귀찮지만 벌을 받는 건 싫은 일이다. 좀 번거로워도 어쨌든 함께하는 것이었던 청소는 이제 시끄럽거나 게으르거나 한심한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똘똘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은 청소하지 않는구나. 그것은 어쩐지 청소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느끼게 했다. “너네는 벌로 다음 주 화장실 청소야”라는 처벌이 허락한 것은 청소하는 아이와 청소하지 않는 아이 사이의 차별이었다. 화장실 청소라는 벌을 앞둔 아이들 가운데는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그 일을 떠넘기며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 청소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또 다른 위계가 생겨났다.


마지막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비교적 착실한 학생이었던 나는 교사 휴게실 청소를 맡았다. 도끼다시 바닥 위로 얇은 카펫이 깔려 있어 별도의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꽃무늬 천 슬리퍼가 정리된 선반 옆에는 커피와 프림과 설탕이 꽃 모양 장식의 흰 사기그릇에 각각 담겨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2교시가 끝난 후에 받은 흰 우유를 꺼내 네모난 종이컵 모양을 만든 후 프림과 설탕을 넣고 휘저었다. 이상하게 부드럽고 미끈대는 우유를 먹으며 다른 아이들의 청소가 끝나길 기다렸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실제 청소의 종료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교문을 향해 뛰어간다. 그 뒤로 화장실의 물청소 소리가 첨벙첨벙 이어졌다.


2019년 8월 9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일하던 청소노동자가 직원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직원 휴게실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쾌적함이 실제 그들의 휴게실에는 없었다. 청소노동자들이 기계실이나 창문 없는 창고를 개조한 비좁은 휴게실에 청소도구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었다. 계단에서 도시락을 먹고, 환복할 공간이 없어 화장실에서 작업복을 갈아입고, 그 작업복을 입으면 유령처럼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LG전자 사옥에서 작업복 입은 청소노동자의 낮시간 로비 출입을 금지했다는 뉴스는 사실 좀 오래되었다. 청소 노동자들의 모습은 자신의 키만 한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선 때에야 비로소 보였다. 그동안 새벽과 일과 후의 시간으로 감추느라 마주할 일 없던 얼굴들이다. 그들이 청소는 하지 않고 시위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드넓은 대학교정의 잔디와 복도와 휴게실과 강의실과 화장실이 어떻게 깨끗해졌는지 본 적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휴게실에서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아는 학생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고, 청소라는 벌이 우리를 가르친 결과는 아니었을까? 청소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근거는 어쩌면 학교에서 힘을 얻었다. 청소에 대한 혐오는 그것이 혐오인 줄도 모른 채 청소라는 벌로 반복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나는 이제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는 고통’인 ‘벌’로써 ‘청소’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청소노동자들은 다른 많은 사람이 그렇듯 자신과 가족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일할 뿐이다. 그들은 잘못을 하지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으며 더 힘들게 일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지게 했던 범인 가운데 하나로 청소라는 벌을 지목한다. 어떤 예사로운 말이 지닌 기이한 무게에 대해 오래 오래 생각한다.


작가 수부

되도록 더 다정해지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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