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마글방 Jan 14. 2021

잔물결

하마글방 수강생 예디의 글

28인치 캐리어의 속박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다. 오른팔이 욱신하다. 여행의 짐은 인생의 짐의 무게와 같다던데, 28인치는 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고작 2박 3일의 여행이기도 했다. 오트밀 색 벽지의 이 방이 3일간 내가 있을 곳이다. 침대에 드러누우니 위로 펼쳐진 머리카락들처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얼굴 위로 드리운 햇살은 방 끝까지 뻗어 있다.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의 끝난 뒤, 딱 2주 만이다. 2주 만에 다시 짐을 꾸려 온 것이다. 사실 꾸릴 짐도 별로 없었다. 나의 게으름 덕에 그대로 방치되어있던 캐리어에서 몇 가지 빼기만 하면 끝이었다.


반듯한 일자리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왔다. 흔한 토익 점수, 자격증 하나 없이 현실에 부딪히자니 두려운 것보다도 내가 너무 초라해졌다. 내가 선택한 과거들이 전부 부정당하는 듯했다. 자꾸만 뭘 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나마 잘하는 것이 여행이었다. 나의 20대는 대부분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색다른 풍경을 보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살아온 세상이 너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일이 즐거웠다.


벌떡 일어나 창문부터 열었다.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려고 전 재산을 털어온 게 아니었다. 불안한 미래는 닥치면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여행을 왔으니 부지런한 여행자이고 싶다.


“수현?”


창문 밖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처럼 단단하게 머리를 꽉 묶은 여자였다. 내가 쳐다보자 그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호스트?”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숙소를 정할 때 얼핏 봤던 프로필 사진 속 얼굴인 것 같았다. 자신을 유미라고 소개한 여자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열쇠를 잘 찾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집 곳곳을 소개한 뒤 나의 다음 스케줄을 물어왔다. 혼자인 여행자에게 무슨 계획이 있으랴. 여행 내내 어떠한 계획도 없다고 답을 하니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후쿠오카에는 여러 번 왔지만, 현지인과 같이 밥을 먹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녁 시간 전까지 볼일이 있다는 유미는 재킷만 바꿔 입고는 다시 나갔다.


약속시간 전까지 뭘 할까 하다가 카페에 가기로 했다. 에코백에 책 한 권과 노트, 볼펜과 카메라를 챙겼다. 한국에서 미리 봐 둔 곳이 있었다. 지도 앱을 켜서 카페 이름을 입력하니 숙소에서 20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20분이면 걸어가기에 나쁘지 않다.


주택들이 즐비한 동네다. 담장 위에 조그만 화분들이 놓인 집, 민트색 차가 차고에 주차되어 있는 집, 어쩐지 으스스한 구멍가게까지. 초보 여행자 티는 벗나 했더니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20분이면 도착한다던 카페는 30분에 걸려 도착했고, 필름 한 롤을 다 써버렸다. 카페 내부는 조용했다. 분위기 탓인지 사람들도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눈을 마주쳤던 카페 주인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아이스 커피를 주문한 뒤 자리를 잡았다.


얼음이 녹아 유리컵에 닿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6시에 롯폰마츠 츠타야 서점 앞에서 만나요. 커다란 건물이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버스에서 내리자 정말 눈에 확 띄는 큰 건물이 보였다. 건물 쪽으로 걷다 보니 저 멀리에 머리 위로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유미를 만나자마자 바뀐 신호등에 서둘러 서점 맞은편으로 길을 건넜다. 골목의 초입에서 유미는 손을 쭉 뻗어 길가 오른쪽의 빨간 벽돌로 지어진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인데, 수현 씨 맘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수도 고장으로 하루 쉽니다.>


“어쩌죠? 오늘 수도가 고장이 나서 문을 닫는다네요. 미안해요.”


유미는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혹시 다른 곳 아는 데 있으세요?”

“그러지 말고, 괜찮으시면 집으로 가요. 장 봐 둔 재료들이 있어요.”


너무 귀찮게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흔쾌히 승낙했다. 근처에 아는 식당이 없기도 했고, 날 위해 요리를 한다는 사람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집밥이라니. 엄마가 해준 밥 말고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나라가 아닌 곳에서 집밥을 먹을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기도 했다.


‘일본은 정말 운전석이 오른쪽이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유미의 차에 탔다. 버스나 택시를 타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이 아닌 차는 처음이라 신기했다. 어색하지 않게 음악을 틀어 주셔서 괜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귀에 익은 노래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내가 흥얼거릴 때마다 유미도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함께 흥얼거렸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뚝딱 한 상이 차려졌다. 갓 지은 밥과 된장을 훌훌 풀어 만든 된장국,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까지. 일본 가정식 특유의 아기자기함과 따뜻함이 물씬 풍기는 상이었다. 가장 먼저 김이 폴폴 나는 된장국을 입김으로 식혀 그릇째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는 말을 남발하며 먹는 나를 보고 유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원래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회사 일만 해도 정신없으니 집에 오면 쉬기 바빴죠. 퇴근길에 뭔가를 포장해서 온다거나 대충 챙겨 먹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직장 동료와 함께 퇴근하는데 저는 샌드위치를 포장하려 했거든요. 근데 동료는 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더라고요. 매일은 못해도 자주 차려 먹으려 한다면서요. 어쩌다 보니 저도 장을 같이 보게 된 거예요. 돈을 썼으니 어떡해요? 요리해야죠.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재밌었어요. 그 후로 종종 해 먹어요. 특히 우울한 날에요. 나를 잘 대접해주고 싶은 거죠. 하지만 맛은 보장 못 하니까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 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됐네요.”


그러고 보면, 언제든 집에서 요리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둥, 귀찮음에 대충 때웠던 것이 사실이다. 큰맘을 먹고 한나절 한 끼 요리를 준비하다 보면, 오늘 하루 이렇게 다 보냈구나 싶지만 뭔가를 해냈다는 기쁨이 숨길 수 없이 찾아온다.


“수현, 샤워는 언제 할 거예요? 지금?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둘까 하는데.”


유미가 물었다.


“아, 저 그럼 바로 할게요.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탕 목욕을 하는 집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함께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유미는 욕조에 물을 받으러 갔다. 몇 안 되는 발걸음 소리에 이어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욕실로 가보니 바구니를 들고 계셨다.


“골라봐요. 입욕제에요. 원하는 향으로 골라요. 장미 향, 오렌지 향, 숲 향. 여러 가지 있어요. 제가 집에 없어도 수현 씨 마음대로 쓰면 돼요. 입욕제가 다 풀리고 탕에 들어가면 되는데, 종종 덜 풀리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손으로 부숴주세요.”


유미는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을 끝으로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고민 없이 오렌지 향 입욕제를 집어 들었다. 평소 시트러스 계열의 향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어떤 입욕제를 쓸지도 미리 정했다. 입욕제가 물에 빠지는 소리는 꽤 경쾌했다. 입욕제가 풀리는 동안 재빨리 방으로 가, 책을 가져왔다. 샤워를 하고 욕조에 들어가니 그제야 욕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집인 것 같지만 잘 정돈되어 있다. 자연스레 나의 집이 떠올랐다. 엉망진창 책상, 모서리가 깨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욕조. 꿈 같은 여행에 취해 미뤄진 현실의 나 같았다.


몸이 달궈지니 나른해진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씻어 본 일이 있었던가. 머리 위로 감아 올린 수건도 깨끗하고 부드럽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욕조부터 고쳐봐야겠다.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상점가를 걸으면서 좋은 향의 입욕제를 찾아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가져온 책을 펼쳤다.


작가 예디

편안히 읽어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n번째 조종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