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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Feb 28. 2023

근하신년 낭독

하마글방 수강생 베니수의 글

  나는 탈가정했다. 이틀 동안 굶은 몸을 일으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동사무소에 가서 '주소 열람 제한 신청'을 했다. 열람 제한 대상에 직계 가족을 넣으면 아무도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이전에는 생존자가 폭력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했으나, 2022년부터 가정폭력 상담센터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을 10회 받았다는 기록만 제출하면 신청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2019년 안내 책자를 들고 안 된다고 하던 사람에게 법이 바뀌었다고 소리쳤다. 상담사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연결해주었다. 신청 접수를 마치고 집에 와 긴 잠에 빠졌다. 친족 성폭력을 겪고 난 후 가족은 안전한 공동체가 되어주지 않았다. 당연히, 모은 돈을 들고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이사 갈 생각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른 상태였다. 탈가정을 한다는 말에 제주도에 숙소를 연결해준 사람이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라며 뺨을 촵촵 때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2022년 8월부터 나는 고양이의 반려인이 되었다. 은회색 빛 털, 햇빛을 받은 잔디 같은 초록 눈을 가진 고양이를 찰랑이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가정폭력 생존자를 위한 쉼터는 고양이가 들어갈 수 없었다. 고양이와 함께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주에서 지낼 숙소는 정확히 말하자면 쉼터가 아니었다. 쉼터 같으면서도 주체적으로 집을 돌보는 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무엇도 몰랐지만 조금씩 아는 친구들과 나보다는 익숙한 친구들이 집을 돌보는 것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나는 흘려듣기도 하고 멀찍이서 떨어져 지켜보기도 하고 같이 의견을 내고 참여하기도 하면서 집이란 공간을 가꾸어 가고 돌보고 지켜갔다. 거주지를 옮긴 후 아주 큰 제주 바퀴벌레에 놀라며 바퀴벌레 약부터 샀다. 벌레에 대한 혐오가 종차별과 연결된다는 생각은 했다. 밤에 잘 때 사각사각거리며 집을 돌아다니다 심지어 날기까지 하는 것을 봤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얘와 공생할 수는 없다고 미안하다며 곳곳에 바퀴벌레 약을 놓았다. 뒤집혀 있는 벌레를 데려다 멀리 화단에 던졌다. 제발 날지 말라고 울상 지으면서. 좀 얄미운 위선자가 되었다. 겨울이 되고 추워지자 벌레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벽마다 창문이 나 있는 집에는 숨을 쉬면 입김이 피어올랐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의 전쟁 이후 기름값이 치솟았다. 제주는 기름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곳이 많았다. 친구가 선물해 준 전기장판과 전기난로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2023년이 왔다는 문구와 느낌표가 멀지 않은 시기에, <슬픔의 방문> 북토크가 있었다. 전날, 옷장을 열어 좋아하는 옷을 만져보고 집 안을 서성이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시사인에서 14년 간 글을 써 온 장일호 기자의 <슬픔의 방문>은 참 사적인 이야기다. 한 사람이 살아남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제목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떡 하니 박혀있다. 누군가는 펑펑 울며 읽었다고 하기에 팔짱을 끼며 어디 한 번 볼까, 책을 펼쳤다. 나는 울지 않았다. 덤덤했다. 대신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첫 문장부터 ‘아버지는 자살했다.’ 로 시작하니까. 첫 문장이 섹시했다. 과장해서 그 문장을 읽은 나를 묘사하자면, 차 안에서 닥터 드레 노래가 나와서(drop) 틀고는 첫 음에 호호우!를 남발하며 코 밑에 손가락을 대는 제스쳐를 하는 모습이었다. 

  북토크에 가서 책 이야기를 너무너무 하고 싶어 미치지는 않았다. 나는 어떤 북토크든, 어떤 이야기가 오갈 것이든, 무엇이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좋았다. 작가의 시간이 지나고 질문 시간의 방문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나 혼자 완독하고 온 사람이었다. 완독했으니 처음 질문이 있다면 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한국의 어떤 분위기라고 하면 분위기라는 것이 침묵을 깨고 먼저 질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낭독을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그때부터 심장이 간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했다.


  “어떤 부분을 낭독해오겠다고 정한 것이 아니어서, 여기서 막 펼쳐보고 보이는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참 무용하지요?” 


  무용해서 꽃도 좋아한다던 장일호 기자가 너무 좋아하며 웃었다. 펼쳤고 놀랐다. 고양이 얘기가 나왔다. 성폭행 생존자 이야기와 인간의 슬픔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고양이가 위안을 주는 일에 대해 그리고 고양이를 위해 생계를 책임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고 싶다는 믿음으로 쭉 이어갔다. 울컥했고 울 뻔했고 울어도 된다고 옆에서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울면서 글을 읽으면 글자는 휘요요용 떨리는 용수철 같은 소리를 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낭독을 이어갔다. 마치 고백 같은 근하신년의 낭독을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사적인 이유는 고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까. 슬픔은 왜 피하고만 싶어질까.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납작해질까 두렵고 이상하게 비칠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던 고통과 슬픔이 멀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탈가정을 했고, 글을 쓰고 춤을 추는, 고양이의 반려인이다.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남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나는 망설인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또한 쓰고 싶어진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낭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고양이가 밟아서 쓴 ‘ㅎ’이 남발되어 있었다. 흐흐흐흐 빠르게 읽었다. 사람들이 웃었다. 슬픔을 반기듯이.






Pictured by @picogreenframe

작가 베니수 Beny Su

1996년생

고양이 ‘찰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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