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때까지 책을 몇 번이고 더 읽는 것 외에 일반 독서가와 다르지 않다는 그의 겸손이 좋았다.
그는 이제 나의 책 큐레이션 1호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형철의 결 따라 책 읽기>를 해 보려 한다.
그 첫 책이 바로 은희경의 장편 소설 <태연한 인생>(2012)이다.
무엇이든 두 번 이상 읽어 본 적이 거의 없는 내가 이번에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한 번은 그냥 쭉 읽어 나갔고, 또 한 번은 이전처럼 노트를 펼치고 찰나의 순간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하면서 보았다.
이 첫 경험은 분명 이전과 차이가 났다. 책을 좀 더 체화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분명하다. 당분간 이런 식으로 읽어 보려 한다. 시간이 좀 더 걸려도.
2010년에서 18년까지 그가 읽었던 책들! 이미 구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신간인 책들을 반려로 만날 그 여정이 기대된다.
은희경은 말한다. '당신 인생이 정말로 태연한지? 순간의 매혹만 쫓고 있지는 않은지?' 삶의 고통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보자.'라고
태연하다고 믿고 있는 나의 인생에 흑색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책이다.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류'의 인생을 배우고 싶다. 태연히 살고 싶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이 책에 대해 쓴 신형철의 글을 다시 읽어 본다.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은희경의 이번 (실험) 보고서는 예리하고 우아하다.'라는 그의 마지막 말만 기억에 담고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려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을 잡은 다음 (류의) 어머니는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갔다.'(p67) - 남편의 부정 앞에 어떤 대응도 하지 않는다. 류의 어머니는 이제 연기를 시작한다. 태연한 인생인 것처럼. 무대 위에 올라가 주어진 역할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반면 류의 아버지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아내의 고통 따위 관심도 없다. 죄책감마저 없다. 이 대조를 보여주면서 과연 태연한 인생이란 이 세상에 있기나 한 건가? 반문하고 있는 은희경 작가. 그만의 남다른 시선이 깊게 다가온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3월이나 제8요일 같은 것.'(p138) - <작가의 말>에 보면, 이 책을 연재하려고 어느 문화관에 있는 작가 집필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름의 구상 계획이 있었는데도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 문장은 거기서 나온 게 아닐까? 김연수도 박완서도 이런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글쓰기가 여전히 어려운 나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다. 매번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런 글을 대하게 된다. 페이스메이커처럼.
은희경의 뼈 때리는 문장들이 계속된다. 50줄에 서서 보이는 그녀의 남다른 인식이 담겨 있다. 진부하지 않다. 아포리즘 그 이상이다. 말 그대로 정곡을 콕콕 지르고 있다. 나의 메모장이 길게 이어지는 이유다.
'사랑이나 돈이나 염치도 마찬가지였다. 갖지 못한 자들일수록 의미를 만드는 데에 집착한다.'(p198) - 특히 사랑이 빠진 관계에 의미라는 걸 부여한다. 그것이 역할이 되고 그때부터 가짜로 태연한 척한다. 서로를 고통과 고독의 심층으로 몰아가면서 그저 연명하는데 겁겁한 인생으로 살아간다. 애잔하다. 이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인데.
눈으로 그냥 쭉 읽어나가는 독서에는 전체의 흐름을 한 번에 연결해서 볼 수 있다는 것과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순간 다가온 뭔가를 기록하지 않았기에 다시 재생하는 것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책 한 권을 오롯이 소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보일 때까지 이 책만 몇 번이고 읽는 것은 일반 독자인 나에게는 너무 과한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지금 만난 반려책에 대한 예의는 지키려 한다. 그래서 당분간 더 느리게 책 읽기를 하려 한다. 지금처럼 한 번은 편하게 또 한 번은 진하게... 이렇게 책 읽기에 변화를 준 신형철 작가에게 감사한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홀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