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옮겨오고서도 육지의 책짐을 엄마네 얹혀놓고 있었는데, 엄마가 결국 폭발했고 이젠 읍소해도 소용없었기에 책을 처분했다. 천 권은 안 됐는데 처분하는 데만 3개월 정도 걸렸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제주에서 가지고 있는 책이 총 50권은 안 넘게 잘 조절하고 있었다. 산 책은 깨끗이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거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다. 동네서점을 다니면 책을 안 살 수가 없고 꼭 간직해야 할 책도 있어서, 산 만큼 처분하면서 아슬아슬하게 50권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책 처분 후 팔다리 뭐라도 하나 잘려나간 것 같은 쓸쓸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읽었던 <<도서관>>을 통해 책에 대한 갈망이 폭발했다.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 앞에서 무너졌다. 이 책의 그녀처럼 내 꿈도 이룰 수 있을 거 같았다. '책욕심을 허하라'라고 기함을 토하며 단숨에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이 되었고, 책 사는 데 너그러워졌다. 한번 쓰이고 버리는, 음식을 싸는 데 쓰이는 온갖 포장 종이박스 같은 걸 생각하면 종이책은 얼마나 신성한가. 난 일 년에 단 한 개의 종이컵도 쓰지 않는다. 배달 앱 같은 건 써본 적도 없다. 배달음식은 스뎅 통 가져가서 받아온다. 그러니 책은 좀 사도 된다.
전자책은 그냥 읽히나? 전용리더기를 사야 하고 충전해줘야 하고 데이터가 들고 서버비용도 든다. 전기는 결국 핵폐기물을 만든다. 게다 표면이 너무 폐쇄적이어서 스크린을 넘기다 울화통이 터진다. 하고 싶을 때 종이질감을 느끼며 줄 치고 메모하고 돼지꼬리 땡땡도 해야 한다. 도그 이어도 종종 만들고. 책등도 만져봐야 하고 각 페이지마다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책 옆구리에서 다 보여야 한다. 전자책은 납작하기만 해서 책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없다. 그저 종이책이 책이다.
문제는 또 생겼다. 내 집도 아니어서 오래 살아도 4년마다 이사 가야 하는데 책이 책상을 넘쳐 바닥까지 내려오니 책장이 필요해졌다. 아 씨... 책장을 사면 혼자 사는 살림에 이사가 힘들어진다. 책 사는 것처럼 집도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상태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면서도 책은 계속 사들인다. 서서 작업하는 책상 주변으로 책이 흘러넘치고 앉아서 작업하는 책상 주변은 더 심각하다. <<도서관>>을 꺼내보니 부동산 문제 얘기는 없다.
결국 부동산 때문에 전자책을 꿈꿔야 하는가. 익명의 독서중독자로서 다크섹시는 전자책을 꿈꿀 리 없다. 그러나 사서는 다르다. 사서는 존엄하다. 책들의 질서를 잡고 관리하고 아낀다. 가끔 진상 사이비 독서중독자들을 상대해야 하며, 책을 사랑하지만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는 슬픈 직업을 가진 노동자다. 노동자로서 사서에게는 전자책을 꿈을 수 있다. 대출 입고 작업이 없으며, 관리도 쉽다. 그러니 전자책이 난무한 세상에서 사서는 자본의 논리대로 해고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색하지 말고 꿈만 꾸면 된다.
사서와 눈맞춤하는 마뇨의 발가락을 핥아먹기 위해 프레임 안으로 침범한 멍멍이
경찰인데, <익명의 독서중독자> 독서클럽에 들어가서, 자기 정체 그대로 경찰이라고 닉네임을 만들고 실제 경찰임을 숨기고 지내는 경찰이, 경찰이냐는 질문에 하는 대답. 젤 웃겼던 장면. 무시무시한 자연의 복수인 폭염과 지하철 백화점에서 칼부림 난무하는 현실을 잠깐 견뎠다. 그리고 도서관 우수회원으로서의 연대감. 난 가족회원까지 등록해 2주에 30권씩 대출가능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