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남성권력집단에서 홍일점으로 일했을 때 나는 돋보였다. 남자처럼 술 먹고 남자처럼 욕하며 남자보다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맘에 들기 위해 여러 가지 가면을 써야 했다. 같이 새벽까지 술 먹고도 더 아침 일찍 출근했다. 그들이 여성을 모욕하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함께 조롱했고, 그들이 넌 역시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 남자 열 명 갖다 줘도 네가 훨 나아, 같은 표현을 할 때마다 더 남자 같이 굴며 그들의 인정을 구걸했다. 첫 번째 단계.
그렇게 비위 맞추며 때에 따라서 다정하고 배려하는 성역할까지 했건만 성추행은 찾아왔다. 남성권력의 부스러기라도 긁어먹으며 성공할 줄 알았는데, 꼬리처럼 앞에 달린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서 생득한 권력을 성찰할 줄 모르던 그들에게 내 몸뚱이는 가지고 놀 만한 것이었다. 정신이 좀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그저 여자일 뿐이구나. 흑인들이 그러했듯. 흑인들이 생래적인 백인권력을 욕망해도 흑인인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난 열등한 그 무엇이었다. 두 번째 단계.
흑인들이 각성 후 실천에 나서듯 나도 각성을 위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그 길은 넓고도 깊었다. 도나 해러웨이, 엘렌 식수, 가야트리 스피박, 오드리 로드, 거다 러너, 낸시 프레이저, 페트리샤 힐 콜린스, 벨 훅스, 주디스버틀러, 엔젤라 데이비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케이트 밀렛... 한국학자는 얘기도 못 꺼냈고, 이론 외에 문학예술 쪽은 시작도 안 했다. (흑인, 아시아인, 퀴어가 끼어 있지만 외국 사람만 먼저 나열해 봤다. 모국어로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너무 많다. 문학, 예술 쪽까지 하면 글이 너무 길어진다. 그리고 외국 사람 얘기해야 무식한 애들이 토 안 단다. 사대주의? 뭐 그것도 있다)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있는지 들뜬 마음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맑시즘을 학습할 때는 계급성분이 쁘띠 부르주아 자식이어서 몰입했음에도 몸까지 점령한 선명한 당파성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주의는 내 몸의, 내 마음의, 내 생각의 이야기여서 수십 년 간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그저 실성한 듯 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단계.
극단에도 서 봤다. 그러나 더 많이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배우면서 내 자리를 조금씩 찾고 있다. 더러운 중산층 지식인 남성과 쉽게 화합하거나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여성들과 뭔가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도 자리는 찾아진다. 네 번째 단계.
그동안 당했던 모욕들을 되돌이켜보면 참 험한 세상 살았다 싶은데, 걸작들에게 당한 건 또 남다르다. 그중 '그리스인 조르바'는 명예남성이었던 첫 번째 단계부터 각성 후 가장 성숙한 네 번째 단계까지 감상이 다 다르다. 조르바가 졸라 멋진 자유인인 줄 알았다가 자의식 과잉에 여성 없이 살 수 없는 찌질이임을 아는 과정까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도 힌트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풉...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데 그걸 묘비명에서까지 선언해서 뭐한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두렵지 않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그것도 묘비명에?
<<여성을 모욕하는 걸작들>>은 새롭게 보고 다시 읽고 한 번 더 생각해 볼 의사가 있는 사람에겐 좋은 책이다. 뭐 뻔한 생각으로 했던 얘기 또 할 것들은 읽기 시도도 안 할 테고, 읽어봤자 뭔 얘기인지 알 수도 없는 테니. 조르바와 이상, 메데이아 이야기는 특히 좋았다. 걸작만 그러겠는가. 누구 말처럼 여성혐오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국민스포츠다. 모욕하는 데 모욕하는지도 모르는 것도 생존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의 첫 번째 단계가 그랬던 것처럼. 가능하다면 평생 그러하기를. 지금도 남성권력과 백인권력은 막강하니까.
이 책의 서문의 쓴 이라영의 이야기는 이렇다.
예술적 남성 동맹이 추구해 온 자유, 아름다움의 개념과 방향성을 의심하지 않으면 전위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자유를 갈구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현실은 외면한다. 권력을 분석하지 않고 자유를 말하는 것, 타자를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예술적 사기다. 자유와 아름다움이 타자를 모욕하며 형성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식이며 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