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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Aug 19. 2023

<<랩걸>>이 일깨워준 몇 가지

호프 자런 <<랩걸>>

<<랩걸>>은 여러 기억과 경험 구석구석 새로운 상상과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불러와 오래오래 곱씹었다. 이 좋은 책이 여러 날 내 몸을 통과해갔다.

- 식물에 대해


가끔 식물난독증 같은 게 있다면 나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연구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식물은 어렵다. 광합성 화학식 같은 건 어렵지 않은데, 식물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뿌리내리고 자라고 이파리를 틔우고 날씨를 견디고 곰팡이과 싸우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아무리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근래에 생각한 이유는 식물이라는 존재, 그 생식과 성장, 죽음이 예측을 벗어나 너무 완벽하고 감동적이어서 이 세상 생명체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 약하고 아름다울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바사삭 깨지는 여러 사례들을 보며 이질감을 먼저 느꼈다. 식물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 주제에 인간이 뭐라고 느끼든 뭔 상관일까? 4억 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아온 그들은 인간 따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사실 그 격차는 주로 식물로 인해 생겨난다. 바다의 평균적인 식물은 약 20일 정도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육지의 평균적인 식물은 100년 넘게 사는 2톤짜리 나무다. 9쪽
과학자들도 나무들이 사람이 아니고,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향해서는. 241쪽.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후 나는 결국 그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결국 이전보다 더 깊이 그 사실을 이해하고 끝날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깊은 의미에서 식물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식물에게 투영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마침내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399쪽


- 과학자에 대해


과학자로 살았다면 이랬겠구나... 랩실에서 먹고 자면서. 얼마나 재밌었을까.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지만 과학자는 먼 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니 음대에 갈 거라 생각했지만 피아노가 싫어진 후 당연히 문과 출신이 되었다. 법대나 영문과를 가라고 했다. 과학자가 되라고 지지해 준 한 단 사람도 없었다.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점수도 좋았는데 왜 난 문과를 갔을까? 물리학과에 가겠다고 했으면 갈 수 있었을까? 이미 오래 전 일인데 그저 아쉽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물리학과 학부로 입학할 수 있지 않을까 인근 대학의 입시 정보를 뒤지면서.   

언젠가 과학분야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요." 179쪽.


- 여성과학자에 대해


어차피 사회는 여성의 성취를 우습게 여긴다. 한동안 여성을 존중하는 남자 보스와 일한 적이 있다. 그가 진보언론 쪽 편집장으로 있었을 때, 회사가 어려워져 임금도 주지 못할 정도였는데 남자 기자들은 다 도망가고 여자 기자들만 남아서 회사를 이끌고 결국 일으켜 세웠다. 그 경험이 여성들을 존중하게 만든 것 같았다. 여자 기자들 임금도 안 주고 일할 때 최종결정권 편집은 역시 그 남자보스가 쥐고 있었다. 밑에서 박박 기면서 일하는 여자들과 그 조직을 대표하는 남자. 낯설지 않다. 암튼 일하면서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차별하지 않는 게 존중이었다. 차별하지 않는 게 기본값이 되지는 않았다.


여성과학자였던 저자의 설움, 고통, 무시와 차별 하나하나가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여성으로 태어난 거 과학자가 안 되길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기구들에서는 과학계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262쪽.
내가 이런 부류의 동료 과학자들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지는 오래다. 그들은 나도 그들과 동등한 학자로서 이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연구 자금을 댄 기관에서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의 눈에 나는... 20킬로그램 정도의 짐도 들지 못하는 지저분한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281쪽


- 사랑에 대해


아, 사랑은 식물만큼 어렵다. 책을 읽으며 내심 그녀가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강인함을 나와 나눌 그와 나의 상상력을 나눌 그'가 나타나자 수긍했다. 그래, 결국 이성애제도와 가부장제의 우산 아래서 거센 비는 피해야지. 강인함의 나눔까지 바란 적도 없다. 상상력을 나눌 사람도 쉽지 않더라.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른이 넘은 싱글여성은 커다랗고 순한 집 없는 개에게 향하는 것과 같은 동정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부스스해 보이는 외모와 자급자족적인 성향 때문에 주인이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지만... 피부병 같은 것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집 앞 포치에서 밥이라도 먹게 해 줄까 고려해 보지만 얼른 그 생각을 접는다.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너무 귀찮게 치댈까 봐 걱정이 되어서다. 291쪽.
나를 사랑한다는 궁극적인 증거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미소를 짓게 해주는 쉽고도 쓸데없는 행동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구에겐가 줘야 할 나의 사랑이 작은 상자에 너무 오랫동안, 너무 단단히 들어가 있어서 상자의 뚜껑을 열자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더욱더 많은 사랑이 들어 있었다. 293쪽.


- 엄마 됨에 대해


이 역시 모르는 영역이다. 저자는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라는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강요된 모성은 결국 그 주체에게도, 그 주체를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했던 자식에게도 정말정말정말 못할 일이다.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326쪽.


- 나에 대해


하고자하는 말의 심장부를 깨끗하게 관통하는 단어들을 머리속 그물에서 해방시켜, 오래 여자 아이들에게 구전될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걸 전달하는 꿈을 꾸는 나

하고자 하는 말의 심장부를 깨끗하게 관통하는 정확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96쪽.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있는 부품으로써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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