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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길이라는 발전길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힘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게 살아간다. 해야 할 일에 쫓기고,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 치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잠자리에 든다. 그러다 갑작스레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히려 불안해한다. 고요와 고독을 낯설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업적들은 대개 이런 고독 속에서 태어났다. 세상과 단절된 순간,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서 오히려 자신과 마주하며 불멸의 작품을 남긴 사람들 말이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허준은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갑작스레 귀양을 가게 된다. 왕과 세자의 건강을 돌보며 궁중에서 가장 바쁜 의관으로 살던 그에게 귀양은 분명 절망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궁궐에서는 너무 바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동의보감’ 집필을 그는 귀양길에서 완성했다. 왕실의 병을 돌보고 긴급한 호출에 밤낮없이 달려가던 삶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의학의 본질을 깊이 탐구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누구에게는 벌처럼 보였던 귀양이, 허준에게는 한 시대의 의학을 갈무리할 기회가 되었다.


허준만이 아니다. 정약용 역시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기간 동안 무려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정치적 음모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벼랑 끝으로 밀려난 그 고독 속에서 평생의 학문을 완성했다. 만약 그가 계속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면 매일 정치적 계산과 갈등에 휘말렸을 것이다. 유배라는 단절이야말로 그를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다듬는 연금술이 되었던 셈이다.


한의 사상가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부처가 된 싯다르타 역시 궁전을 떠나 끝없는 수행과 방황 끝에, 결국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보리수 아래 49일간 홀로 앉아 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던 그 시간은, 화려한 왕궁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진리의 순간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그 안에 숨어 있던 진리가 들린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하다.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물질주의에 지친 스스로를 숲으로 내몰았다. 월든 호숫가에서 2년 2개월을 홀로 살아가며 농사를 짓고 집을 고치고 자연과 마주했다. 그 고독 속에서 ‘월든’이라는 명작이 완성됐다. “나는 숲으로 갔다.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로에게 고독은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과학자였던 뉴턴도 비슷하다. 1665년 런던에 페스트가 퍼져 케임브리지 대학이 폐쇄되자, 스물세 살의 뉴턴은 고향 농가로 돌아갔다. 18개월간 거의 혼자 지내야 했다. 그는 그 고독 속에서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학, 광학 이론을 차례로 정립한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라고 회상했다. 재앙 같았던 페스트가 과학사 최고의 천재를 단련한 것이다.


이들의 삶은 한 가지 메시지를 남긴다.
고난은 단순히 견뎌야 할 시련이 아니라, 우리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물론 고난이 자동으로 성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한다. 허준과 정약용이 포기했다면, 싯다르타가 고행을 중단하고 궁으로 돌아갔다면, 소로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면, 뉴턴이 시간을 허비했다면 역사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결국 차이를 만든 것은 고독을 대하는 태도다.
세상과의 단절을 불행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깊이 만나는 기회로 받아들일 것인가.
혼자 주어진 시간을 막막한 정적이라고 느낄 것인가, 아니면 성장의 문턱이라고 볼 것인가.


물론 귀양 같은 일은 현대에는 있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각자의 ‘귀양길’은 찾아온다. 예상치 못한 실직, 건강의 위기, 관계의 끝, 사업의 실패처럼 삶이 우리를 갑자기 멈춰 세울 때가 있다. 대부분은 그 순간을 원망하고 두려워한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냐고 묻는다. 하지만 역사를 비춰보면, 바로 그런 순간들이 오히려 삶을 전환시키는 가장 값진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고난을 피하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질문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외로움과 비탄으로 채울 것인지, 아니면 성찰과 성장으로 채울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귀양길은 걷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절망의 길이 될 수도, 새로운 시작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 길을 어떻게 걷고 있는가.
때로는 이 질문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우리가 성장하는 데 가장 필요한 순간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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