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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자리 교체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중원에서 윙백을 거쳐 최전방 공격수로 올라갔던 선수가 갑자기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마도 처음엔 어색할 겁니다. 몸은 여전히 공격의 리듬에 익숙한데, 시야와 마음은 전혀 다른 수비의 각도로 세상을 봐야 하니까요.


20년이 넘도록 세무조사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장부를 쓸어오는 조사부터 해외 자료를 수집하는 조사까지, 어찌 보면 국세청의 최전방 공격수로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탈루를 찾아내는 것이 임무였고, 순간의 판단과 결단이 승패를 갈랐습니다. 매일이 경기였고, 매 순간이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다 퇴직을 맞이했습니다. 능력이 줄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부에서는 더 좋은 자리를 제안하며 남아달라고 했습니다. 안락한 책상, 안정된 지위, ‘갑’의 위치. 어쩌면 거기에 머무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를 조용히 내려놓았습니다.

“안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야.”
“남의 돈 버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
수없이 들었던 동료들의 말들을 뒤로하고, 저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처음엔 두려웠습니다.

매일같이 보고서와 사건으로 가득했던 책상이 텅 비었고, 출근길의 긴장감이 사라졌습니다. 몸은 여전히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세상은 느리게 흘러가더군요. 그 낯선 고요 속에서 나는 묘한 허전함과 함께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오랜 세월 저는 ‘조사관’이 아니라 ‘조사라는 경기’ 속의 한 포지션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조직이 정한 전략 안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찾아내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반대편에서 그 경기를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 심문이 아니라 조언으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이번에는 세무 전문가로서, 납세자들의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막는다는 건 단순히 세금을 줄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부당한 득점을 하라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누군가의 억울함을 막아주고, 불필요한 오해와 실수를 차단하는 일이지요.

과거엔 ‘왜 탈세했느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합니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역할의 변화였습니다.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오니 새삼 보이는 게 많습니다.
법의 문장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의 사정, 조정계산서 너머 삶의 무게. 이제는 그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지난 20년간 공격수로서의 날들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골키퍼로서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공을 막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그라운드 전체를 읽는 일이니까요.

국세청에서의 20년이 내게 ‘힘’을 줬다면, 지금의 나는 그 힘을 ‘방향’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퇴직을 끝이라고 말하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인생 2막의 킥오프 휘슬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최고의 수비수로서 이름을 날리는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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