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현실 고민
얼마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20대 후배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25살 때 어떤 고민을 하셨어요?"
결혼, 인생의 의미, 재테크, 직장 등 다양한 고민을 했었는데 어떤 고민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번에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고 다음을 기약했죠. 문득 제가 20년 전에는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해서 과거의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녹색은 일기장 원문을, 그 밑에는 지금 현재의 생각을 덧붙여 봅니다.
[결혼]
2004.7.21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자일까? 키는 나보다 조금 작은 163 정도였으면, 몸무게는 그냥 약간 통통한 정도였으면 좋겠다. 성격은 약간 활발한 성격. 종교는 무교였으면, 물론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하지는 않지만 너무 신실한 것은 싫다. 직업은 같은 직종이었으면 좋겠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학력은 최소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여자여야겠지. 가족은 부모님이 다 계셨으면 좋겠고, 형제자매는 누나 아니 언니가 있는 집안이 좋겠군. 항상 내가 맏이였으니까 여자 쪽은 맏이가 아니었으면. 너무 고르는 걸까? 인연을 믿는다면 너무 오래 걸리려나? 2년 안에 가야지.
: 지금 아내의 모습과 대략은 비슷합니다. 물론 몇 가지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일기에 적었던 것과 비슷하게 찾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일기를 적은 2년 후인 2006년 6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적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크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떤 것을 원하든, 원하는 모습이 있든 종이에 적으면 그것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04.12.6
토요일에 아버지에게 여쭤보았다. 25살에 결혼하셨을 때 특별히 준비를 하셨냐고. 아버지 말씀은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에 바로 맞선을 보고, 아버지 의사보다는 할아버지의 의사가 강해서 결혼을 하셨다고 했다.
: 사실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사를 생각하면 매우 막막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할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막연하지요. 그런데 정작 결혼을 하고 나면 결혼 전에 고민했던 것들이 모두 사소해지더군요.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말고 자신과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이야기하며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 결혼의 본질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의 의미]
2004.09.12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오는 날은 웬지 기분이 감정적이 되는 거 같다. 비, 비 오는 소리, 그런 것들이 생각을 많이 불러일으킨다. 오늘 싸이를 접었다. 일과 후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싸이. 이제 그만 집중하련다. 먼가 의미 있는 걸 하고자.
운동, 그래 남는 건 체력 밖에 없다. 조금 더 생산적으로 살아야겠다. 너무 소비적으로 살았다.
내 나이 스물여섯, 미래를 위해 무얼 하고 있는지.
그냥 막무가내로 열심히 하면 될까? 그건 아닌 거 같다.
방향을 잡고 준비를 해야겠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처럼, 무언가 목표를 잡고 열심히 살아야지.
인생의 의미,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
: 인생의 의미는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삶의 의미라는 거창한 어떤 모토를 잡으면 오히려 더 막막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삶을 충실히 살며,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방향을 고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너무 막연한 목표는 진로를 혼란으로 이끄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거창한 의미보다 매일의 작은 실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2005.08.21(일) pm8:58
긴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다. 이번 휴가는 나름 알차게 보냈다. 4일간의 여행, 10권의 독서. 그중에서도 가족의 의미를 다시 느끼게 한 휴가. 어머니가 19일 하지 정맥류 수술을 하신다고 해서 가족끼리의 여행은 하지 않았다. 금요일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서 수술 전후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족이 아픈 것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옆에 있는 것 밖에는 없었다. 항상 세상의 우선순위를 부유함을 꼽던 나에게 근본적인 뿌리는 건강임을 일깨워 주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부도 행복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 돈이 최고인 줄 알았지요. 그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했지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던 계기였습니다. 지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더 자주 찾아뵙고 함께 시간을 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재테크]
2004.11.17 수
참 우습다. 내가 팔 때는 떨어지고, 살 때는 오르고, 참 힘들다. 돈 버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벌써 두 달 치 월급은 그냥 날린 거 같다.
쉽다. 돈을 잃는다는 게.
어떻게 해야 돈을 벌려나.
: 돈을 버는 일은 참 쉽지 않습니다. 투자는 더더욱 어렵지요. 그 당시에는 주식에 대해서 공부도 하지 않고 그저 감으로 투자하다가 2달치 월급을 날려버렸지요. 사람들은 수익만 생각하지만 워런 버핏이 이야기한 것처럼 잃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한 투자 원칙입니다. 재테크를 하며 버는 것뿐만 아니라 잃지 않는 것도 고민했더라면 지금쯤 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05.7.3(일요일)
저녁에 아파트 가격을 둘러보았다. 인터넷 시세로는 대부분 1억 5천을 넘는 것들이었다. 과연 이자비용을 부담하고 집을 사는 것이 나은 건지. 아니면 전세로 사는 것이 나은건지. 1년 정도 더 전세로 있다가 일반 민간 분양 아파트에 가는 건 어떨까? 어차피 결혼하면 새로 들어가야 할 테니. 양도세, 취득세, 등록세, 이사비용까지 포함하면 아니다. 5.5%가 기타 부대비용이라는데. 1억 5천만 원이면, 거의 9백만 원 천만 원이 되는 비용인데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자기 자본을 모으고.
: 아직 집이 없었지요. 전세에 살고 있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사회생활을 했었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전세를 얻었지요. 아파트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부대 비용이 너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이때 무리를 해서라도 샀어야 했는데. 그때는 비용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자산은 젊을 때 취득할수록 효과가 크며 특히나 1 주택은 능력이 된다면 빨리 마련하는 것이 유리하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직장]
2004.12.04 (화) pm8:05
올 한 해 이제 보름 정도 남았다. 어쩌면 시간의 구분이라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올 한 해 무엇을 남겼나 싶다. 내 이력서에 법인세과 경력 1년 이외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을까? 운동 신경이 늘었던 거, 볼링 에버러지를 높인 것. 내년에는 방송통신대 입학과 함께 공부에 매진하자. 지금 아니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과장님의 말처럼 늙어서 후회하지 말고, 젊을 때 공부하자.
: 그 당시 과장님의 나이쯤 되어 보니 이해가 됩니다. 정말 20대에는 치열하게 공부하며 자신의 실력을 쌓을 시기였는데 그런 생각을 못했나 봅니다. 늘어나는 실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죠. 돌이켜보면 그저 시간만 보낸 듯한 막막한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모여 나중에 자신의 실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20대에는 잘 몰랐습니다. 과거에 너무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그 시간들에 더 치열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듭니다.
2005.01.07 pm 10:20
어제오늘 내 지식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과장님이 왜 법령을 외우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납세자가 더 알고 제2차 납세의무자에 대해 따지고 들 때 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세무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늘은 용역의 무상공급에 대해 물었다. 그나마 지난번에 외웠던 법령의 효과였을까? 묻자마자 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가공급을 묻자 책자를 뒤적여야만 했다. 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제부터라도 부가가치세법부터 외우기 시작해야겠다. 몇 십조 되지 않는 짧은 조문임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약해서인지 외우지 못했다. 하루에 한 조문씩이라도 외우자.
: 아직은 공부가 많이 부족해서 납세자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답답해만 하고 실천은 부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기에 적었던 '하루에 한 조문씩'이라는 작은 다짐이라도 지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작은 실천의 힘을 그때는 몰랐네요.
20년 전 일기장을 펼치고 나니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저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하나,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나, 공부는 언제 해야 하나 고민만 가득했던 이십 대 중반의 저를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20대의 고민들은 하나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해했지만, 그 고민들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되었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고민만 하고 실천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일기장에는 늘 "해야지", "하자"는 다짐만 가득했지 실제로 얼마나 실천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도 일기를 적는 힘은 분명 있었습니다. 원하는 배우자의 모습을 적었고, 2년 후 정말 결혼했으니까요. 적는 것만으로도 목표가 구체화되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20대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너무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매일의 작은 실천을 쌓아가라고.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함께할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무엇보다 젊을 때 치열하게 공부하고 자신의 실력을 쌓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2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부족함과 오류 투성이지요. 하지만 그때의 고민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앞으로도 계속 저의 시행착오가 일기에 적힐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60대에 다시 40대를 펼쳐 보며 과거의 고민을 되돌아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