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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여행

머릿속 일꾼들

시험 전날 밤,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형광펜을 들고 중요한 부분에 줄을 그으며, "이건 꼭 외워야 해"라고 되뇌었던 그 밤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날 시험지를 받아 들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곤 했죠.


분명 어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 기억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사실 우리 머릿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일꾼들이 기억이라는 소중한 짐을 조심스럽게 나르고 있는 거예요. 오늘은 그 일꾼들의 이야기를 할께요.


일곱 개의 작은 공간


우리 머릿속에는 '작업기억'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마치 작은 사무실에 일곱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것처럼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정보가 일단 이 테이블 위에 놓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를 차례로 설명하십니다. 네 개의 정보가 들어오면, 일곱 개의 테이블 중 네 개가 벌써 차버립니다. 남은 공간은 고작 세 개뿐이에요.


그런데 여기 현명한 방법이 있습니다. 네 개의 정보를 따로따로 두지 않고, '선사시대'라는 하나의 큰 상자에 함께 담는 거예요. 구석기부터 철기까지를 '역사의 흐름'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면, 일곱 개의 테이블 중 하나만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보를 묶어서 정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뇌가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먼 창고로 가는 여정


테이블 위에 놓인 정보는 아직 진짜 우리 것이 아닙니다. 잠깐 머물다 사라질 수도 있는 임시 손님 같은 존재죠. 진짜 기억이 되려면, 장기기억이라는 깊은 창고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합니다.


그 창고로 가는 길을 상상해 볼까요? 동굴처럼 깊고 어두운 창고가 있고,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수많은 일꾼들이 정보라는 상자를 하나씩 들고 그 긴 길을 걸어갑니다.


하지만 이 여정이 생각보다 힘듭니다. 길을 가다 보면 지쳐서 주저앉는 일꾼도 있고,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일꾼도 있어요. 실제로 창고 깊숙한 곳까지 도착하는 일꾼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일꾼들이 힘들게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일꾼들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테이블 위의 새로운 정보를 정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길 위에 있던 기억들은 창고에 도착하지 못하고 흩어져버립니다.


잠시 멈추는 용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기억을 안전하게 창고에 보낼 수 있을까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잠시 멈추는 거예요. 새로운 정보를 넣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겁니다.


점심을 먹고 20분만 눈을 붙여보세요. 잠을 자는 동안에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니면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걸어보세요. 걷는 동안에는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요.


이 고요한 시간 동안, 일꾼들은 비로소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 창고 깊은 곳까지 기억을 운반합니다.


30분 공부하고 5분 쉬는 것이 2시간을 꼬박 앉아 있는 것보다 나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쉬는 동안 일꾼들은 자기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기억은 우리 안에 단단히 뿌리내립니다.


특별히 기억되는 순간들


50분짜리 수업을 떠올려볼까요?


수업이 시작될 때는 모든 게 새롭습니다.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순간의 기억 상자에는 특별한 꼬리표가 달립니다. '새로운 시작', '첫인상', '설렘' 같은 감정들이요.


그런데 20분, 30분이 지나면 어떤가요? 조금씩 지루해집니다. 비슷한 설명이 계속되고, 변화가 없습니다. 이때의 기억 상자들은 특별한 표시 없이 비슷비슷하게 생겼어요.


하지만 수업이 끝날 무렵은 또 달라집니다. "드디어 끝이구나"라는 안도감, "이제 쉴 수 있어"라는 기대감이 생깁니다. 마지막 순간의 기억 상자에도 특별한 꼬리표가 붙습니다.


처음과 끝은 특별합니다. 일꾼들의 눈에 유독 잘 띕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일꾼이 그 상자를 집어 들고 창고로 향합니다. 반면 중간의 평범한 상자들은 대부분 길 위에 남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은 잘 기억하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 거예요.


다시 찾아가는 기억


창고에 무사히 도착한 기억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으면 창고 구석으로 밀려나고, 먼지가 쌓이고, 결국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게 회상입니다. 조용히 앉아 "오늘 뭘 배웠지?"라고 천천히 떠올려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잘 생각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디 있더라?" 하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다 보면, 일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혹시 길 어딘가에 떨어뜨린 건 아닐까?" 하며 왔던 길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러다 "아, 여기 있었구나!" 하고 기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다시 들어 올려 창고 안쪽, 꺼내기 쉬운 곳에 정성스럽게 놓아둡니다.


이렇게 회상을 통해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씩 주워 담다 보면, 그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창고 입구가 아니라 가장 찾기 쉬운 선반 위에,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자리 잡게 되는 거죠.


기억과 함께 걷기


우리는 기억에게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억과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될 수 있어요.


정보를 정리할 때는 이야기로 엮어보세요. 흩어진 사실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보는 겁니다.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일꾼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처음과 끝만 특별한 게 아니에요. 중간에도 작은 의미를 만들어보세요. "아, 이 부분은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하는 작은 발견들이 평범한 기억에도 특별함을 더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세요. 오늘 배운 것들을 조용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길 위에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씩 주워 담는 그 시간이 쌓이면, 어느새 당신만의 단단한 지식이 만들어질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고 있고, 어떤 일꾼은 그 기억을 조심스럽게 들고 긴 여정을 시작했을 거예요.


잠시 눈을 감고 오늘 읽은 내용을 천천히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기억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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