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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400억을 짊어진 남자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스스로를 붙잡은 이야기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그를 처음 만난 건 며칠 전 개업식 자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50대의 평범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그 평범함 뒤에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뒤였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사업 실패담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무너지면서도 끝내 삶을 놓지 않았던 기록에 더 가까웠다.


20대 시절, 사람들은 그가 부유한 아버지 덕에 돈을 펑펑 쓰며 자랐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20대라는 나이에 그가 써본 돈이란 기껏해야 조금 더 비싼 음식을 먹는 정도였다. 돈 쓸 줄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단조로웠던 그의 세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부동산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청년이 갑작스레 떠안게 된 빚의 규모는 400억이었다. 4억도 아니고, 40억도 아닌 400억. 지금도 아닌 몇 십년전 그 숫자를 마주했을 때 그가 느꼈을 막막함을 나는 그저 상상할 뿐이다.


그는 우선 은행 문을 두드렸다. 지금 짓고 있는 부동산 건물을 담보로 대출이라도 받아보려 했다. 은행 본점 담당자가 말했다. 100억을 넘으면 정부 허가가 필요하다고. 99억 정도라면 가능할 테니, 부동산에 들어온 가압류부터 풀라고 했다.


그는 채권자들을 찾아갔다. 가압류 대신 새로운 회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각자가 가진 채권 금액만큼 지분을 나누고, 부동산이 팔릴 때마다 지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돌려주자고. 대신 지금 걸린 가압류는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등기가 깨끗한 상태로 부동산을 매각할 수 있고, 대기업 투자 유치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생각엔 그게 채권자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돈을 더 많이 회수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채권자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너 말고 아버지 나오라고 해.”


쓰러진 아버지를 어떻게 데려올 수 있단 말인가? 20대 청년의 이야기는 그저 허공에 흩어졌을 뿐이었다. 결국 대출은 실행되지 않았고, 숱한 가압류로 인해 부동산은 경매조차 진행되지 못한 채 장기 방치된 물건이 되어버렸다.


“대출 받아서 네가 갖고 튀면 어떻게 하냐?”


채권자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을 비참함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사업이 무너지는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은 가슴 깊이 남았다. 나름 1층의 좋은 상가 자리라며 친구들에게 분양 계약을 해주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이 그들에게 금전적 어려움을 안겨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관계도 점점 멀어졌다.


그는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살고 싶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어디로 떠날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일식집을 시작했다. 한 끼에 12만 원을 받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비싼 음식을 먹었던 그의 입맛 수준은 높았고, 그렇기에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장사가 잘되는 날에는 돈이 수북이 쌓였다. 이렇게만 벌 수 있다면 금세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식집 프랜차이즈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방장은 잦은 결근을 했지만, 그가 직접 요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묵묵히 참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큰일이 터졌다. 비브리오 패혈증이 발생하면서, 그 많던 매출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식당에 고객이 들어오지 않았고 텅 비어 버렸다.


직원들의 월급부터 임차료까지 하루에 200만 원씩 적자가 쌓였다. 열흘이면 2천만 원, 한 달이면 6천만 원이었다. 은행에서는 대출 이자를 독촉했고, 이자가 밀리자 사업 자체를 경매에 넘길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은행 직원과 담판을 지었다.


“3개월만 기다려주세요. 원금은 상환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일식집에 투자한 금액조차 건지지 못한 채, 또 한 번 장사의 막을 내렸다. 일식집에 쏟아부은 돈도, 새로 시작하려던 꿈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신은 왜 그렇게 제 앞길을 막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런 어려움이 있기에 삶을 견뎌내는 힘을 배우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강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요.”


400억의 빚을 진 그날 이후, 그는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배웠다고 했다.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았던 순간, 스스로를 믿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지금도 그 무게는 여전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이 모든 시간이 언젠가는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무게를 안고 산다. 다만 그 무게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느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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