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러든 마음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라, 적응의 중력일 뿐이야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대기업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자꾸 팀장님에게 혼나요.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능력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어요.
사회 초년생이라서 그런지 점점 움츠러들고, 제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무서워져요. 회의 시간에 아예 입을 닫게 돼요.
이럴 때, 퇴사를 고민하는 게 맞을까요?


“내가 정말 능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문제인 걸까?”


나 역시 사회 초년생 시절,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유난히 날카로웠던 상사의 지적,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삼켜버린 의견들, 그리고 ‘나는 안 되나 봐’라는 무력감.


과거 내가 국세청에 첫 발령을 받고 권위적인 선배들 앞에서 입조차 떼지 못하던 내 모습과 꼭 닮은 너를 보니 안타깝네.


먼저 이것만은 꼭 말해주고 싶어. 네가 혼나는 걸 무조건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해. 세무사로서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것 자체가 네 능력을 증명하는 거야.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 네가 '권위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는 거지. 그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움츠러든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적응의 중력이야.


퇴사를 고민하며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네게, 내가 통과해 온 그 시간의 기록을 담아 이 질문들을 건네고 싶어.


1. 네가 듣는 건 '피드백'이니, 아니면 '비난'이니?


사회 초년생에게 지적은 피할 수 없는 소나기와 같아. 하지만 그 빗줄기가 나를 씻겨주는 단비인지, 나를 썩게 하는 산성비인지는 구분해야 해.


한 번 자문해 볼래?

팀장님의 지적이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다음엔 이렇게 해봐"라는 구체적 피드백이라면, 조금 쓰더라도 삼키면 약이 될 거야.

그런데 "이것도 모르냐?", "또 틀렸네" 같은 인격적 비난이라면 그건 네 실력 문제가 아니라 그 팀장의 인격 문제야.


화살을 네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찔러대지 마. 너는 대기업이라는 치열한 곳에 당당히 입성한 실력자라는 걸 잊지 마.


2. "틀릴 것 같다"는 완벽주의라는 감옥


“제가 이야기하면 틀릴 것 같아요.” 네 말 뒤에 숨은 두려움이 읽혀. 하지만 세무 실무에 ‘영원불변의 정답’이 어디 있겠니? 세법은 매년 바뀌고 판례는 뒤집히는 법인데 20년 경력이 넘은 나도 내가 혹시 틀리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들어. 그러니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내가 조사국 시절 가장 걱정했던 후배는 틀리는 친구가 아니라, 틀릴까 봐 입을 닫아버리는 친구였어. 침묵은 성장을 멈추게 하거든. 조직은 말하지 않는 사람을 ‘문제없는 사람’이 아니라 ‘없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틀리면 고치면 돼.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네가 가진 논리의 싹을 보여줄 기회조차 사라져 버려.


3. 새로 올 동기, 너를 비춰줄 객관적인 거울


그나저나, 너와 비슷한 연차의 세무사가 조만간 팀에 합류한다고 들었어. 이건 네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


그 친구가 들어오면, 조용히 관찰해 봐. 팀장님이 그 친구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지. 비슷한 실수를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친구도 똑같이 혼나고 위축되는지.


만약 그 친구도 비슷하게 혼난다면, 이건 명백히 팀장의 스타일 문제야. 네 능력과는 무관한 거지. 오히려 그 친구와 함께 "우리 팀장님은 원래 저런 사람이구나"하고 서로 위로하며 버틸 수 있는 동지가 생기는 거야.


반대로 그 친구는 팀장님과 잘 소통하고, 혼나는 빈도도 적다면? 그것도 괜찮아. 그때는 그 친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어떤 타이밍에, 어떤 톤으로, 어떤 방식으로 보고하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잖아.


어느 쪽이든, 이 비교는 네게 객관적 데이터를 줄 거야.

"내 능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상황적 요인이 큰 건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점 말이야. 지금은 네가 유일한 타깃처럼 느껴지겠지만, 비교 대상이 생기면 훨씬 명확하게 보일 거야.


4. 나를 지키는 '3개월 실험'을 제안해


솔직히 말할게. 만약 3개월 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네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진다면, 퇴사도 선택지야. 하지만 그때는 '도망치는 퇴사'가 아니라 '준비된 퇴사'가 되어야 해.


물론 대기업 경력은 네 이력서에 큰 자산이야. 가능하면 1년은 채우는 게 좋아. 회사 안에서 팀 이동이 가능한지, HR 멘토링 제도가 있는지도 알아봐. 그리고 정 안 되면, 다음 직장을 미리 알아보면서 퇴사 타이밍을 전략적으로 잡아.


하지만 지금 당장 사표를 던지기엔 우리가 가진 정보가 너무 적어. 나는 네게 ‘결단’이 아니라 ‘실험’을 권하고 싶다. 딱 3개월만 실험을 해보자.


첫 번째 달, 기록하기: 지적받은 내용을 적어봐. 네 반복된 실수인지, 팀장의 일관성 없는 기분 탓인지 기록은 거짓말을 안 해.


두 번째 달, 방식 바꾸기: 소통의 방식을 바꿔봐. 말로 하기 부담스럽다면 “검토 후 메일로 정리해 보고 드리겠다”라고 시간을 벌어. 텍스트는 네게 논리적 완충지대가 되어줄 거야.


세 번째 달, 작은 성공 수집하기: 아주 작은 성공들을 수집해 봐. 네 의견이 1%라도 반영된 순간들을 모아 ‘자존감 통장’에 저축하는 거야. 아마 너에게는 혼나는 이야기만 들리고 맞는 이야기는 그냥 지나가겠지만 설령 성의가 없더라도 너에겐 중요하니까.


5. 도망치는 퇴사가 아닌, 선택하는 퇴사를 위해


3개월 뒤에도 여전히 숨이 막힌다면, 그때는 퇴사해도 좋아. 하지만 그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내 가치를 알아줄 곳이 아님을 확인하고 떠나는’ 주도적인 선택이어야 해.


너는 지금 '적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거야. 이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야. 단지 네 팀장이 그 과정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을 뿐이지.


능력 부족 때문에 혼나는 게 아니야. 네가 조직의 암묵적 룰을 아직 모를 수도 있거든. 그 룰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3개월, 6개월, 1년이 될지는 모르지. 그 시간 동안 네가 성장하는 것도 보고, 상황이 개선되는 것도 보고, 새로 들어오는 동기와의 비교를 통해 네 위치도 객관적으로 파악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떠나도 늦지 않아.


한 가지만 약속했으면 좋겠어. 이 과정에서 네 자존감까지 움츠러들게 하지는 마. 너는 여전히 유능한 세무사야. 단지 지금은 조금 까다로운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이 시간이 지나면 너는 후배의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채고 다독여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리더가 되어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씩 나랑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자.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뭘 시도해 봤는지, 어떤 변화가 있는지. 내가 추천해서 들어간 곳에서 네가 힘들어하는 게 미안하지만, 동시에 나는 네가 이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질 거라고 믿어.


네가 흘린 오늘의 눈물은 무능함의 증거가 아니라, 더 좋은 세무사가 되고 싶다는 진심의 흔적이야. 그 진심을 나는 믿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느날 400억을 짊어진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