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행간을 읽는 법

어느 세무조사관의 세 가지 시선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최근 개봉한 영화 <휴민트>를 보며 옛 생각이 났습니다. ‘휴민트’라는 단어가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정보 업계에서는 아주 익숙한 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을 통해 얻는 정보’를 뜻하죠. 사실 정보의 세계에는 휴민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공개된 자료를 분석하는 ‘오신트’, 데이터를 통해 정보를 취득하는 ‘테킨트’ 같은 것들입니다.


제가 과거 역외탈세 정보 요원으로 일했던 기억을 더듬어보며, 이 생소한 용어들이 실제 세무조사 현장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역외탈세'라고 하면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긴박한 추격전을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화려함보다는 지루할 정도의 인내심, 그리고 집요한 노력 끝에 겨우 얻어내는 아주 작은 조각들의 싸움이죠. 제가 경험한 정보 수집은 이미 완성된 퍼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흩어진 파편들을 하나하나 모아 거대한 진실의 그림을 복원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습니다. 보안상 상세한 내용은 담을 수 없지만, 그 맛만 살짝 보여드리겠습니다.


1. OSINT: 소셜미디어, 누구나 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행간


2010년대 중반, 서류상으로는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무역회사가 있었습니다. 수출신고필증부터 대금 결제 내역까지, 종이 뭉치 속에 담긴 숫자는 모두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동의 어느 낯선 주소지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걸렸습니다.


저는 온라인 지도를 켜고 그곳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면 속 주소에는 번듯한 빌딩 대신 평범한 주거 단지가 서 있더군요. 이어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표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가 올린 일상 사진 한 장의 배경에서 저는 사무실이 아닌 누군가의 '거실' 풍경을 포착했습니다. 가공된 서류 뒤에 숨은 페이퍼컴퍼니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OSINT(공개출처정보)의 힘입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지만, 목적을 가진 눈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데이터일 뿐입니다. 저는 그 거실 풍경에서 완벽했던 서류의 빈틈을 읽어냈습니다.


2. HUMINT: 김치찌개를 마주한 찰나의 진심


때로는 가장 강력한 단서가 가장 무방비한 장소에서 들려오기도 합니다. 휴민트(인간정보)의 핵심은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가진 사람과 신뢰를 쌓고 그 관계를 '관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느 점심시간, 오랜 기간 유대 관계를 맺어온 지인이자 해외 파견을 마치고 복귀한 지인과 마주 앉아 김치찌개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사적인 근황을 전하며 현지에서 겪은 소회를 가볍게 털어놓았습니다.


"요즘 미국 서부 쪽 부동산이 인기라며? 부부 공동명의로 많이들 산다더라고. 최근엔 어느 저명인사 자녀 부부도 거기 집을 샀다던데.“


지인으로서 건넨 무심한 한마디였지만, 제 머릿속엔 '미국 서부', '공동명의'라는 키워드가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HUMINT의 위력입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한 문장에는 절대 담기지 않는, 사람 사이의 온기와 신뢰가 섞인 대화 속에서만 새어 나오는 날것의 정보죠.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온 관계 속에서 경계가 풀린 찰나의 그 한마디가 거대한 조사의 나침반이 되기도 합니다.


3. TECHINT: 데이터의 숲에서 길을 찾는 집요함


직관이 방향을 정했다면, 증명은 냉철한 기술의 몫입니다. 저는 다시 사무실의 푸른 모니터 앞에 앉아 방대한 데이터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부동산 등기 데이터베이스에서 수만 개의 이름을 필터링하고, 가족관계와 국제 송금 기록을 교차 검증했습니다. TECHINT(기술정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결코 친절하게 먼저 답해주지도 않습니다. 엄격한 승인 절차를 거쳐 확보한 송금 데이터를 촘촘히 연결하자, 비로소 부자(父子) 사이의 은밀한 자금 이동 패턴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세 가지 눈을 가진 조사관으로 산다는 것


물론 이 사례는 해당 자산가가 자진신고를 하면서 조용히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제게 깊은 울림을 남기지요. 저는 동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조사관에게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말에서 실마리를 잡는 눈(HUMINT), 공개된 정보에서 패턴을 읽는 눈(OSINT), 그리고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해 그림을 완성하는 눈(TECHINT)이죠.


하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단면만 보이지만, 세 개의 눈이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입체가 완성됩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숫자의 뒤편으로 진실을 숨기려 하겠지만, 그 행간을 읽어내는 조사관의 눈이 살아있는 한, 진실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현장에서 배운 가장 귀중한 교훈이었습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숫자의 행간을 짚어내고 있을 세무조사관 선후배님들의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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