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가득한 날, 가족과 함께 걸은 인조의 길
찬바람이 매섭던 일요일, 황사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뿌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밖에 외출을 하자고 하니 아들이 한마디 던진다.
"이렇게 공기도 안 좋은 날, 왜 굳이 밖에 나가야 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집안에만 있기엔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싶어 "가족 행사 겸 머리라도 식히고 오자"며 아들을 달래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마주한 남한산성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방대했다. 일요일 오후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 넓은 성곽을 다 도는 것은 무리였기에, 행궁과 역사관, 그리고 북문 정도만 둘러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행궁의 시작을 알리는 한남루를 지나 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곳은 인조가 전쟁을 대비해 마련한 행궁이라고 한다. 화려한 궁궐을 뒤로하고 이 험한 산성까지 찾아와야 했던 임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외행전 집무실을 지날 때, 문득 고개를 들어 본 처마의 곡선과 단청의 색감이 유난히 아름답게 다가왔다. 비록 황사가 섞였을지언정, 푸른 겨울 하늘과 대비되는 선명한 지붕의 채색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한참을 걷다 한자로 적힌 응청문(凝淸門) 앞에 멈춰 섰다. 사실 처음 "응(凝)"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주머니 속 AI에게 물어보니 '맑은 기운이 모이는 문'이라는 뜻이더라. 그 뜻을 알고 나니 탁한 공기 속에서도 왠지 맑은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붕 끝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처구니(잡상)들도 눈에 띄었다. 지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인형들이 없으면 얼마나 황당할까 생각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말의 유래를 떠올려 본다. 궁궐의 액운을 막기 위해 저 높은 곳에서 추위와 바람을 견뎌온 그들의 모습이 듬직하면서도 애처로워 보였다.
행궁 위쪽으로 더 올라가니 임금의 침소였던 내행전이 나타났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머물기엔 너무나 좁고 검소한 방. 화려한 도성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곳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인조의 괴로움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내행전 뒷길의 조그만 비원만이 그나마 임금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지 않았을까?
담장 너머로는 종묘의 역할을 대신했던 정전이 보였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역사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 했던 선조들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어서 방문한 역사관에서는 남한산성을 지켜온 이들의 처절한 기록을 마주했다. 전시된 고문서 속 한자를 이번에도 AI에게 물어보니, 당시 방어 책임자가 왕에게 "군사가 턱없이 모자랍니다"라고 보고하는 절박한 내용이었다. 단순히 안내판의 간단한 내용이 아니라 조금 더 상세한 실제 내용을 보니 호기심과 궁금증이 풀린 느낌이었다.
역사관을 나와 AI가 추천해 준 조망 명소인 북문으로 향했다. 그 길에는 역사 탐방을 온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차려입고 가벼운 걸음을 내딛는 등산객들이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건강과 여유를 찾는 소중한 산책로라는 사실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코끝이 찡했다.
북문을 지났음에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좀 더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매서운 추위와 배고픔 앞에 가족들은 결국 "여기까지!"를 외쳤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을 결정했다.
식당가 리스트를 앞에 두고 또다시 AI의 도움을 받으려 하자, 가족들의 핀잔이 쏟아진다. "당신 주관은 어디 가고 AI랑만 살아?" 장난 섞인 압박에도 꿋꿋이 찾아낸 산채정식 식당.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고단한 발걸음 뒤에 마주한 산나물들은 한 입에 피로가 풀리는 맛이었다. 가족들은 그 많던 나물을 눈 깜짝할 새 비워내며 밥상을 깨끗이 정리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렸다. 운전하느라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뒷좌석에서 "와, 저거 봐!" 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차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잠실 롯데타워의 야경. 과거의 성곽 도시에서 현대의 마천루를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우리가 누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비록 찬바람과 미세먼지가 함께한 일요일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넘겨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꽃피는 봄이나 단풍이 짙게 깔릴 가을에 다시 한번 이 길을 걷기로 기약하며, 남한산성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