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묻다

늦기 전에 말해야 할 것들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또 한 권의 두툼한 책이 서가에서 사라졌다.
누군가의 수십 년이 빼곡히 적혀 있던 한 권의 생이 조용히 덮였다.


죽음은 초대하지 않았지만 끝내 맞이해야 하는 손님이다. 누군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함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가슴을 짓누르는 비통함으로 각인되는 단어. 우리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살아간다.


엄숙한 장례식장 안.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적막한 공간에서 나는 문득 허기를 느낀다. 무심히 숟가락을 들며, 이 장면의 모순을 생각한다. 숭고한 슬픔조차 식욕이라는 원초적 본능 앞에서는 잠시 밀려난다. 인간은 이렇게도 단순하고, 또 이렇게도 솔직한 존재인가. 입안의 음식이 모래알처럼 씹힌다.


장례식장에는 서로 다른 색의 슬픔이 고여 있다.
오랜 병마 끝에 평온을 바랐던 마지막도 있고,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마침표도 있다.

오늘 내가 마주한 이별은 불행히도 후자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다녀오실 만큼 건강하셨다던 친구의 아버지. 모일 때마다 농담을 건네고 노래를 부르시던 분이었다. 팔순이라는 숫자가 무색할 만큼 기력이 넘쳤기에, 가족들에게 ‘죽음’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몇 해는 더 곁에 계시겠지.’


그 막연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벼운 감기는 순식간에 급성 폐렴으로 번졌다. 준비할 틈도 없이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버지는 그렇게 생의 끈을 놓으셨다.


“언젠가는 가시겠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어요.”


조문을 받는 막내딸의 붉게 짓무른 눈시울을 마주하자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아꼈던 딸이었다. 전하지 못한 말들이 눈물이 되어 쏟아지는 듯했다. 타인의 슬픔임에도 그 비통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서 인간은 작고 무력하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마다 나는 나의 소중한 이들을 떠올린다.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시간 되면 보자.”


아무렇지 않게 건네던 그 말들이 어쩌면 다시는 완성되지 못할 문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죽음은 순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별은 예고 없이 문을 두드린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참 행복하다고 말하는 일. 그 당연한 고백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잊기 전에, 늦기 전에.


오늘 우리가 나누는 온기가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한 번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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