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커리어 시대, 한 아버지의 고백
어느덧 아이가 대입을 앞두고 있다.
주변 어른들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야 한다. 이 말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떠돌다 보니, 마치 그것이 진리인 양 아이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겠다. 과연 그게 맞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자꾸 걸리기 때문이다.
미국 최고의 명문대라 불리는 HYPS — 하버드(Harvard), 예일(Yale), 프린스턴(Princeton), 스탠퍼드(Stanford) — 를 졸업한 사람들이 오히려 취업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한때는 그 이름만으로 인생의 문이 활짝 열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조차 좁아지고 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최근 주변에서 듣게 된 이야기는 이 혼란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커리어가 무너지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영리한 사람들은 지금 이것을 하고 있다"
학교 졸업 후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고 승진하다 은퇴하는 이른바 '과거의 직장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기술의 가속, AI의 등장, 그리고 시장 구조의 변화로 인해 수십 년간 우리가 믿어온 방식이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가치를 파는 '셀프 브랜딩'이 필요하다. 과거처럼 시간을 팔아 월급을 받는 구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재능과 전문성 자체를 하나의 제품처럼 만들어 수익화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프리랜서로 뛰거나 창업을 시작하라는 뜻은 아니다. 회사라는 울타리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회사를 건너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이미 우리 아이들의 희망 직업 순위에도 나타난다. 요즘 청소년들이 꿈꾸는 직업 1순위는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다. 어른들은 그것을 철없는 꿈이라고 일축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세대가 '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자기 존재 자체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식, 바로 그것이 앞으로의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학벌의 효용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계는 존재한다. 특정 직종, 특정 사회에서 출신 대학은 여전히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이에게 또 다른 불이익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그 문을 열기 위해, 아이의 청춘을 통째로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가?
AI는 이미 많은 직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단순 반복 작업뿐 아니라, 법률 문서 검토, 의학 진단 보조, 회계 분석, 번역까지 —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던 전문직들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0년간 산업사회가 만들어온 '직업의 지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강요하는 것은, 마치 GPS가 보급된 시대에 종이 지도만을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고유한 능력은 어디서 발휘되는 것일까? 나는 요즘 자주 그 질문을 한다. AI가 할 수 없는 것, 대체될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람다움'에서 나온다. 공감하는 능력, 맥락을 읽는 감각, 창의적 결합,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력 — 이런 것들은 학벌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험과 경쟁 속에서 소진되는 것들이다.
나는 아이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 무엇을 잘하느냐? 하지만 그 질문조차 지금의 아이에게는 부담이 될까 봐 조심스럽다. 입시라는 거대한 압력 앞에서,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 대신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공부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다른 길이 있다. 대학이 인생의 유일한 관문은 아니다.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가 아니다.
주변 어른들은 내 말에 반대한다. 그런 말을 하면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고,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합격 통지서가 아니라, 어떤 길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어야, 어떤 길에서든 제대로 걸어갈 수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커리어는 무너지고, 일자리의 지형도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 앞에서 영리한 사람들이 하는 것은 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찾고, 그것으로 가치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질문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의 힘은 예전만 못할 것이다.
대신 이런 질문은 오래 남을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만들 수 있습니까?”
나는 아이가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