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자와 쓰지 않은 자

오늘 한 페이지면 충분합니다.

며칠 전, 오래된 지인 부녀와 점심을 함께했다. 따님은 선생님으로 일하며 동화책을 몇 권 펴낸 저자였다. 반면 지인은 머릿속에만 원고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막막하다고 말한 사람은 쓰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인은 30년 넘게 관세 분야에서 일해왔고, 이제 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과거에 학위라도 따놓을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지금이라도 자격증을 더 취득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주위 사람들이 어떤 걸 제일 많이 물어보시나요?"


지인은 관세사 자격증도 있었고, 수십 년의 관세 현장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해당 분야는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고 했다. 실무를 많이 접했지만 막상 본인이 직접 신고를 수행한 경험은 없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경쟁자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불안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불안이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책을 쓰시라고.


학위보다, 박사 학위보다, 자격증 한 장보다 — 책 한 권이 전문성을 더 강하게 증명한다고 말씀드렸다.


자격은 통과의 증표이겠지만 책은 축적의 증거다.


특히 관세 분야는 세무 세계에서도 극히 협소한 영역이다. 이론서는 있어도 실무서는 거의 없다. 30년의 내부 조사 경험, 관세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노하우는 그 어떤 교과서에도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이 바로 책이 되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했다.


옆에 계시던 따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선생님들도 "어떻게 써요?"라고 물어보고는, 개요만 작성하다 멈춘다고. 그래서 따님은 아버지께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써보시라고 권했다 했다.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 정리가 되면 쓰겠다.

- 출판사가 정해지면 시작하겠다.

- 조금 더 준비가 되면 하겠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이 두려운 경우가 더 많다.


나 역시 하루 한 페이지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수백 페이지를 어떻게 채우나, 출판사는 어떻게 찾나, 표지 디자인은 누가 하나 — 이 모든 것이 시작도 전에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러나 그 막막함은 쓰기 전에 드는 감정이다.

한 줄을 쓰면 두 줄이 보이고, 한 페이지를 쓰면 다음 페이지가 보인다. 책은 완성된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만들어진다.


책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일 필요는 없다. 관세 실무서를 수만 명이 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을 손에 쥘 독자는 분명 존재한다. 수입통관을 처음 맡은 실무자, FTA 적용을 고민하는 중소기업 담당자, 관세 조사를 앞두고 두려운 기업 임원. 그들에게 그 책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신뢰의 증거가 된다. 강의 요청이 오고, 자문 의뢰가 따라온다. 책은 명함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책을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고 믿는다.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책을 낸 사람은 ‘저자’로 불린다. 독자는 그 사람을 저자로 기억한다. 저자는 곧 전문가라는 인식을 얻는다. 이 공식은 세상이 바뀌어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분이 정말 책을 내실지는 모른다. 하루에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하실지도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자격증을 하나 더 따도 경쟁자는 여전히 많다.
학위를 늦게 따도 세상은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다른 사람이 된다.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된다.


저자가 된다는 것은 경험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남기는 일이다. 30년의 축적이 책 한 권으로 정리되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경력을 넘어 그 분야 후배들의 자산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퇴직 이후에도 계속 살아 숨 쉬는 전문가의 삶 아닐까.


부디 오늘, 한 페이지만 써보시길 바란다.
한 페이지는 작지만, 쓰는 사람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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