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예술가의 도록을 채우다

junghaein.com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오늘부터 시작하는 전시회 도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이트를 만들기까지의 애환을 담아 올려 봅니다.

https://www.junghaein.com/


20년 넘게 내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누군가의 장부를 파헤치고 숫자의 이면을 추적하던 조사관의 가방이었다. 하지만 오늘 3월 26일, 홍콩의 낯선 거리에서 나는 그 가방 대신 붓과 펜을 든 '예술가'로서 서게 되었다.


전시를 불과 며칠 앞둔 밤, 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나의 작품 15점을 세상과 연결할 디지털 도록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이 도록은 홍콩까지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지인들, 거리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이들. 그들에게도 이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직접 벽 앞에 서지 못하더라도, 화면을 통해 잠깐이라도 이 골목들을 걸어볼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래서 홍콩으로 떠나기 전에 반드시 완성해야 했다.


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넘어 있었다. 눈꺼풀은 자꾸 아래로 내려앉고, 어깨는 묵직하게 굳어 있었다. 그냥 자고 싶었다. 하지만 화면은 끄지 못했다. 전시까지 며칠이 남지 않았고, 이것 하나만 끝내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의자에 붙들어 놓았다.


코딩이라는 낯선 언어는 마치 난생처음 보는 세법 조항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7번 사진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10번 사진은 확장자가 달라 길을 잃었다. 오류 메시지는 내가 무언가를 고칠 때마다 어김없이 다시 떠올랐다. 'Starting...'이라는 글자 앞에서 화면이 멈춰버리는 순간,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불안이 찾아왔다. 요즘 세상은 이것저것 다 하려다 경쟁력을 잃는다고 말한다. 집중하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고. 그 말이 화면 속 오류 메시지처럼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세무 전문가가 코딩을 붙잡고 씨름하고, 전직 조사관이 붓을 들고 홍콩 거리를 배회하다니. 본업이나 잘할 것이지, 이 잡스러운 것들을 붙들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자기 반성은 생각보다 깊이 파고들었다. 오류 메시지를 고치는 손은 멈추지 않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물음이 맴돌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오류 메시지 하나를 잡아내는 순간, 묘한 쾌감이 있었다. 20년 동안 숫자의 이면을 추적하며 느꼈던 그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흩어진 단서를 모아 하나의 진실로 수렴시키던 그 느낌. 코드 한 줄 한 줄을 고치고 화면이 바뀌는 순간, 나는 그 오래된 감각을 다시 만났다. 하나씩 바로잡힐 때마다 무언가가 쌓이는 느낌이 좋았다. 마치 빈 땅에 벽돌을 올리듯, 페이지가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춰갔다. 그림이 제자리를 찾고, 제목이 붙고, 설이 달렸다. 내 손으로 지어 올리는 건물이었다.


드디어 화면에 15점의 그림이 정갈하게 늘어선 순간,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홍콩 센트럴의 은밀한 문 허거 머거부터, 일상의 허기가 머무는 풍경인 멋진 출입구, 그리고 옛 정취를 품은 완차이 우체국까지. 뿌듯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오래 공들여 키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느낌, 그게 가장 가까웠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다. 20년의 공직 생활을 뒤로하고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중간 보고서다. 내 도록에는 그림마다 질문이 달려 있다. "쓰임이 변해도 문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품고 있을까요?"라는 물음처럼, 나 역시 조사관에서 예술가로 쓰임이 변했지만,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홍콩에 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이 도록은 지금도 열려 있다. junghaein.com에 들어오면 15점의 그림과 그 그림이 품은 질문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 벽 앞에 서지 않아도, 잠깐 그 골목들을 걷다 올 수 있다.


조사관의 예리한 시선에 예술가의 따뜻한 숨결을 더해, 나는 오늘도 나의 세계를 그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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