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1층을 쌓기 시작합니다

홍콩 개인전 시작합니다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막막했습니다.


1년 중에 가장 바쁜 달이 3월입니다. 세금쟁이에게 3월은 숨 쉴 틈 없는 시간이죠. 그중에서도 3월 말은 정말 법인 결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에 전시회라니요.


저는 전업 작가도 아닙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 무료 전시회거든요.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죠.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여보, 내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홍콩에서 전시회를 여는 거예요. 전시회를 열어도 물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한두 사람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돈도 들어가는 일이고요. 하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어려움은 더 커질 것 같거든요. 그나마 지금이 가장 가능한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거라면 해봐요."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예술은 아는 게 없어서,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해보라고 등을 밀어준다는 것. 가족의 지지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더군요. 고작 한 문장이면 됩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이렇게 썼지요.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대신, 이번엔 문을 열어보려 합니다.' 그때는 솔직히 반쯤은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해보고 싶다고만 했으니까요.


https://brunch.co.kr/@hermite236/1927


그런데 문을 열었습니다.


당장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갤러리 섭외는 우여곡절 끝에 끝냈고 작품 선별도 몇 개는 해두었지만, 액자, 운송, 홍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끝도 없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요.


과거에 여러 사람과 함께 그룹 전시회를 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오롯이 제 이름 하나를 걸고 하는 전시회는 처음입니다.

전시회 포스터.jpg 참여 작가가 많았네요

제 이름 석자를 내걸고 전시회를 연다는 것.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누군가 제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봐 줄까요? 아니면 텅 빈 갤러리에 저 혼자 서 있게 될까요? 솔직히 둘 다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제가 서 있다는 것이니까요.


전시회 장소는 홍콩 센트럴에 있는 갤러리입니다.


12/F, Tin On Shing Commercial Building, 41-43 Graham Street, Central, Hong Kong.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위쪽에 있는 곳이죠. 홍콩을 여행해 보신 분이라면 한 번쯤 그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나라의 홍대나 이태원과 비슷한 란콰이펑 근처이기도 합니다. 좁은 골목 사이로 갤러리와 카페, 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동네예요.


전시 기간은 3월 26일 목요일부터 3월 28일 토요일까지입니다.


그 시기에 홍콩에서는 아트 바젤이 열립니다. 완차이라는 지역에서 열리는데, 센트럴에서 지하철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전 세계 예술가들이 홍콩으로 모이는 그 시간, 같은 도시 안에서 저도 제 그림을 걸어둡니다. 물론 아트 바젤과 제 전시회를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겠죠. 저는 아직 그 무대까지 갈 역량은 안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에 그림을 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요.


건물에는 층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단 번에 10층에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1층을 밟아야 2층에 갈 수 있고, 2층을 지나야 3층이 보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올라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계단을 택하려 합니다. 한 층 한 층 밟으며 올라가는 쪽이 제 성격에 맞습니다. 느리더라도 직접 밟은 계단은 무너지지 않으니까요.


이번 홍콩 전시회가 제1층입니다.


겨우 1층에 불과하죠. 하지만 1층이 없으면 나머지 층도 없습니다. 기초가 되는 이 한 층을 단단하게 쌓아보려 합니다.


다음 2층은 아마 국내 전시회가 되겠지요. 이번 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조만간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전시회를 국내에서 준비해 보겠습니다. 홍콩에서 시작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 몇 년 전, 홍콩에서 한 법인장님이 제 그림 노트를 보고 "이거 팔 수 없나요?"라고 물었던 그 순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제야 하나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지난번 글에 첨부했던 포스터를 기억하시나요? Claude AI에게 부탁해서 가상으로 만들어봤던 전시회 포스터. 그때는 상상이었습니다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네요.

포스터는 아마도 여기에서 크게 바뀌진 않을 거 같네요

아직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입니다. 작품을 고르고, 액자를 맞추고, 홍콩까지 운송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전시 안내문도 만들어야 하고, 방명록도 준비해야겠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두려움보다 설렘이 조금 더 큽니다.


세금쟁이가 예술가의 1층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숫자와 법조문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건 전시회를 엽니다. 홍콩 센트럴의 좁은 골목, 에스컬레이터 위쪽 어딘가에 제 그림이 걸립니다.

너무 먼 곳이라 찾아오지 못하시더라도 괜찮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1층에 벽돌 하나를 얹어주시는 것이니까요.


정해인 개인전 안내

주제: 門&問

일시: 2026년 3월 26일(수) ~ 3월 28일(토)

장소: 12/F, Tin On Shing Commercial Building, 41-43 Graham Street, Central, Hong Kong

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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