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개인전 시작합니다
막막했습니다.
1년 중에 가장 바쁜 달이 3월입니다. 세금쟁이에게 3월은 숨 쉴 틈 없는 시간이죠. 그중에서도 3월 말은 정말 법인 결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에 전시회라니요.
저는 전업 작가도 아닙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 무료 전시회거든요.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죠.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여보, 내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홍콩에서 전시회를 여는 거예요. 전시회를 열어도 물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한두 사람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돈도 들어가는 일이고요. 하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어려움은 더 커질 것 같거든요. 그나마 지금이 가장 가능한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거라면 해봐요."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예술은 아는 게 없어서,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해보라고 등을 밀어준다는 것. 가족의 지지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더군요. 고작 한 문장이면 됩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이렇게 썼지요.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대신, 이번엔 문을 열어보려 합니다.' 그때는 솔직히 반쯤은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해보고 싶다고만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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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을 열었습니다.
당장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갤러리 섭외는 우여곡절 끝에 끝냈고 작품 선별도 몇 개는 해두었지만, 액자, 운송, 홍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끝도 없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요.
과거에 여러 사람과 함께 그룹 전시회를 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오롯이 제 이름 하나를 걸고 하는 전시회는 처음입니다.
제 이름 석자를 내걸고 전시회를 연다는 것.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누군가 제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봐 줄까요? 아니면 텅 빈 갤러리에 저 혼자 서 있게 될까요? 솔직히 둘 다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제가 서 있다는 것이니까요.
전시회 장소는 홍콩 센트럴에 있는 갤러리입니다.
12/F, Tin On Shing Commercial Building, 41-43 Graham Street, Central, Hong Kong.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위쪽에 있는 곳이죠. 홍콩을 여행해 보신 분이라면 한 번쯤 그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나라의 홍대나 이태원과 비슷한 란콰이펑 근처이기도 합니다. 좁은 골목 사이로 갤러리와 카페, 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동네예요.
전시 기간은 3월 26일 목요일부터 3월 28일 토요일까지입니다.
그 시기에 홍콩에서는 아트 바젤이 열립니다. 완차이라는 지역에서 열리는데, 센트럴에서 지하철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전 세계 예술가들이 홍콩으로 모이는 그 시간, 같은 도시 안에서 저도 제 그림을 걸어둡니다. 물론 아트 바젤과 제 전시회를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겠죠. 저는 아직 그 무대까지 갈 역량은 안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에 그림을 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요.
건물에는 층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단 번에 10층에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1층을 밟아야 2층에 갈 수 있고, 2층을 지나야 3층이 보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올라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계단을 택하려 합니다. 한 층 한 층 밟으며 올라가는 쪽이 제 성격에 맞습니다. 느리더라도 직접 밟은 계단은 무너지지 않으니까요.
이번 홍콩 전시회가 제1층입니다.
겨우 1층에 불과하죠. 하지만 1층이 없으면 나머지 층도 없습니다. 기초가 되는 이 한 층을 단단하게 쌓아보려 합니다.
다음 2층은 아마 국내 전시회가 되겠지요. 이번 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조만간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전시회를 국내에서 준비해 보겠습니다. 홍콩에서 시작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 몇 년 전, 홍콩에서 한 법인장님이 제 그림 노트를 보고 "이거 팔 수 없나요?"라고 물었던 그 순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제야 하나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지난번 글에 첨부했던 포스터를 기억하시나요? Claude AI에게 부탁해서 가상으로 만들어봤던 전시회 포스터. 그때는 상상이었습니다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네요.
아직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입니다. 작품을 고르고, 액자를 맞추고, 홍콩까지 운송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전시 안내문도 만들어야 하고, 방명록도 준비해야겠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두려움보다 설렘이 조금 더 큽니다.
세금쟁이가 예술가의 1층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숫자와 법조문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건 전시회를 엽니다. 홍콩 센트럴의 좁은 골목, 에스컬레이터 위쪽 어딘가에 제 그림이 걸립니다.
너무 먼 곳이라 찾아오지 못하시더라도 괜찮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1층에 벽돌 하나를 얹어주시는 것이니까요.
정해인 개인전 안내
주제: 門&問
일시: 2026년 3월 26일(수) ~ 3월 28일(토)
장소: 12/F, Tin On Shing Commercial Building, 41-43 Graham Street, Central, Hong Kong
관람료: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