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는 않은데, 불행한 어느 여자의 결혼
중년의 그녀는 이혼서류를 네 번이나 냈다.
네 번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결심하고, 제출하고, 힘들게 다시 결심하고, 또 제출했다. 그녀의 서랍 어딘가에는 아마 거절된 서류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도장을 찍어서 제출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용을 보완했지만 법원은 역시 거절했다. 그 종이들은 단순한 서류가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되찾으려 했던 증거들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그녀에게 묻는다. 남편이 폭력을 휘둘렀냐고. 도박을 했냐고. 바람을 피웠냐고. 그런 것이 없다면, 당신의 불행은 법이 인정하는 불행이 아니라고.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집 안에서 알바를 한다. 적지만 돈도 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는다. 술도 마시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손을 댄 적도 없다. 법이 이혼 사유로 인정하는 항목들을 하나씩 대어봐도, 그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그의 하루다. 그것이 그의 세계다.
그녀는 반대다. 밖에서는 에너지가 넘친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웃는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힘이 쭉 빠진다. 컴퓨터 화면 빛을 받으며 혼자 밥을 먹는 남편의 뒷모습. 대화도 없고, 함께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는다.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섬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법에 어떻게 설명하나. 판사 앞에서 뭐라고 말하나. "남편이 집에만 있어요"라고? "함께 있으면 힘이 빠져요"라고? 법은 그 말을 들을 귀가 없다. 명백한 가해가 없으면, 명백한 피해도 없다. 조용히 소진되는 삶은 법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나라다.
혼인신고는 하루면 된다. 구청에 서류 하나 내면 두 사람은 법적 부부가 된다. 그런데 그 관계를 끝내는 데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감정이 식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지만, 법이 그것을 인정하는 데는 훨씬 오랜 시간이, 아니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 필요하다.
민법 840조는 재판상 이혼 사유를 여섯 가지로 규정한다. 부정행위, 악의의 유기, 심한 부당대우, 3년 이상 생사불명, 불치의 정신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 마지막 조항이 그나마 숨통처럼 보이지만, 법원은 이것을 좁게 해석한다. 집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남편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소진시키는지, 법은 관심이 없다.
이것을 유책주의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어야 이혼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독일은 다르다. 프랑스도 다르다. 많은 나라들이 파탄주의를 택했다.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졌다면, 그 자체로 이혼 사유가 된다.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두 사람의 확인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혼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파탄이 증명되어야 한다. 상처가 눈에 보여야 한다. 법이 납득할 수 있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합의이혼을 하려면 재산의 절반을 내어줘야 한다. 그것도 벽이 됐다. 내가 벌어온 돈, 내가 지켜온 집, 그것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유의 값이 너무 비싸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서랍 속 서류를 꺼내지 못한 채 산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집에서 나가겠다고. 그러자 남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본인 동의 하에 나가라고.
자기 집에서 나가는데 남편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마 오래된 결혼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일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딸이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성인의 앞길에 무슨 말이에요."
딸의 한마디가 오래 맴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세대 하나가 들어 있다. 엄마는 결혼이란 버티는 것이라고 배웠다. 힘들어도 참고, 싫어도 견디고, 법이 허락하지 않으면 나가지도 못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그런데 딸은 다르게 알고 있다. 성인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누군가의 동의를 받아야 나갈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두 세대가 같은 장면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본다. 그리고 나는 딸의 눈이 맞다고 생각한다.
21세기라 이야기한다. 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말하는 시대다. 그런데 결혼 제도는 아직도 다른 시대의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법은 여전히 결혼을 유지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이혼을 막고, 숙려하게 하고, 사유를 요구하고, 재산을 걸림돌로 만든다. 개인의 행복보다 결혼 제도의 존속이 먼저라는 듯이.
나쁘지 않은데 불행한 결혼이 있다. 파탄도 아닌데 매일 조금씩 소진되는 삶이 있다. 그 불행은 이름이 없고, 그 소진은 증거가 없다. 법은 그것을 불행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묻고 싶다. 파탄이 나야만 이혼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파탄이 나기 전까지의 시간은 누가 책임지는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힘이 빠지는 그 감각을, 서랍 속에 쌓여가는 서류들을, 결심하고 포기하기를 네 번이나 반복한 그 나날들을.
이혼서류를 몇 번이나 내야, 이 나라는 한 사람의 불행을 진짜 불행으로 인정해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