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만 받겠습니다.
그에게 국세청에서 세무조사 통보가 왔다. 본인, 아버지, 어머니. 세 사람의 자금출처 조사였다. 재무팀에서 일하던 그는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내가 뭘 했다고. 특별히 큰 재산을 취득한 것도 아닌데 의아했다. 국세청에서 나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회사 서류를 뒤지다 나왔다는 것이다. 30억이 그에게 꽂힌 것이다. 회사에서 본인 계좌로 들어간 기록을 보니 수표 뒷면엔 본인 서명까지 있었다. 그는 위조를 의심했지만 서명은 맞았다.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 보니 그날은 공과금 납부 마감일이었다. 은행 영업시간이 지나 법인 계좌에서는 이체가 안 됐다. 그래서 은행 직원이 방법을 알려줬다. 법인에서 개인 계좌로 이체하고, 개인이 수표로 납부하면 된다고. 그는 주저 없이 했다. 당연한 절차처럼. 회사 돈이 잠깐 자기 계좌를 거쳐간 것뿐이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수표를 찾은 그날이 공교롭게도 회사 임원들이 무기명 채권에 서명하던 날과 겹쳤다. 출처를 묻지 않는 채권. 국세청은 비자금의 연결고리를 찾았다고 봤다.
여러 세무사를 찾아다녔지만 다들 돈부터 얘기했다. 억울한 사람한테 돈 얘기가 먼저 나오니 지쳤다. 마지막으로 지인이 소개해준 연로한 세무사님을 찾아갔다. 80이 넘은 고령이었고 국세청에서 잔뼈가 굵었던 분이었다. 사정을 다 듣더니 말했다. "밥값이나 주세요." 국세청이 만든 문제를, 국세청 출신이 풀기로 했다.
세무사님과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광복절 연휴가 포함된 어느 날이었다. 수십 년 전 거래 흔적들을 하나하나 꿰맞췄다. 세무사님은 쉬는 날도 없이 파고들었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세무사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이건 잘 끝날 것 같으니 장어나 먹고 가요."
결과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그래도 그 말이 믿어졌다. 아니 믿고 싶어졌다.
집에 들어간 그날 밤, 둘째가 생겼다. 나중에 날짜를 계산해 보니 둘째가 생긴 날이 딱 맞았다.
그는 둘째 얼굴을 볼 때마다 세무조사가 떠오른다고 했다. 고마워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