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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Jul 15. 2018

화해의 제스처, 대충 김밥

토요일 낮 점심 메뉴로

또다시 냉전은 시작되었다 


어른이 먼저라는 아내와 

아이들의 의견도 들어주자는 나의 주장

어쩌면 그건 점심 메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고방식 차이의 문제였다 


대가족에서 살아왔던 아내 

그래서 늘 아이들보다는 어른을

특히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의견을

존중했던 분위기에서 살았다 

그랬기에 아이들은 어른의 의견에 잘 따라야 하고

어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와 달리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으로 

내가 원하는 식단을 많이 차려주셨다

오히려 어머니가 장남인 나를 더 챙겨주셔서

남동생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 생활환경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먼저 의견을 구하고 

웬만하면 의견을 따라주려 한다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의 차이를 

존중해주기보다 서로 자기 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분쟁상태로 만든 건 

나의 책임도 많이 커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하나 하다가 

새벽에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아내가 옆에서 "김밥 참 맛있어 보인다"

라는 말을 하고는 방으로 사라졌다 


새벽에 김밥을 만들지는 못하기에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김밥을 시작했다 


일단 밥통을 열었는데 

밥이 없다 저걸로는 1인분도 못 싸겠다 싶어 

밥을 했는데 나중에 정말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햄으로 속을 넣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스팸으로 대신했다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스팸 

한 번 뜨거운 물에 데쳐서 볶았는데

돼지 비린내가 좀 난다 

이번엔 지단

일단 한쪽면은 그런대로 익어가는데 

뒤집는 과정에서 아뿔싸 찢어졌다 

가슴이 찢어지듯 속상하다 


나머지 한 장을 더 부쳤다 

우리 집 식성 좋은 하마 두 분이 있어서 

정말 어마어마하게 드신다 

하지만 두 번째 장도 실패 

지단은 내겐 너무 힘든 미션이다 


이번엔 당근

다행히 썰어놓은 당근이 있었다 

얼마나 익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볶다 꺼냈다 

아내가 김치 볶음을 해 놓은 게 있어서

그것도 조금 꺼냈다 


물기가 많은 채로는 쓸 수 없어 

프라이팬에 바짝 볶았다 

문득 차라리 김치볶음밥이나 할걸 

괜한 짓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벌려 놓은 것들이 많아 

여기서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나 밥통을 열었을 때의 난감함

거의 10인분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밥

'저 많은 밥을 언제 다 말지?' 하는

막막한 느낌이 들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준비된 재료를 가지고 식탁 앞에 앉았다 

두 하마 분들 눈치를 채고 의자에 앉아

먹이를 기다린다 


김밥 한 줄을 싸자마자 냉큼 먹어치운다 

아빠가 만든 건 무조건 OK이라며 

맛으로 먹는 건지 허기로 먹는 건지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렇게 대충 김밥은 완성되었다 

아내가 부디 대충 김밥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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