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걷고, 먹고, 멍때릴 수 있다면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를 간밤에 정주행했다. 사실 제목이 평범해서 손이 잘 가지 않았지만, 한 번 재생을 시작한 후로는 멈출 수 없었다. 주인공 박하경(이나영 분)은 토요일 하루 동안 떠나는 여행을 통해 일상을 점검하고, 일상에선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절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사람,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군산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예술을 이어가는 옛 제자(극중 박하경은 고등학교 국어교사다), 어릴 적 도피처가 되어 주었던 만화를 그린 만화가. 일상과 여행이 맞닿은 지점을 박하경은 부드럽게 걷는다.
가장 마음이 갔던 회차는 2화 ‘꿈과 우울의 핸드 드립’과 3화 ‘메타멜로’다. ‘꿈과 우울의 핸드 드립’에서는 박하경의 옛 제자 연주(한예리 분)가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는 연주는 해맑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연주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연주의 그림과,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연주의 춤을 보며 박하경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러고 나서 박하경은 국어 교사다운 언변으로 연주에게 최대한 칭찬을 해준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힘을 얻은 연주는, 그 힘을 다시 예술에 쏟는다.
왜 하필 군산이고, 왜 하필 예술인지. 연주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극중 연주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이 하고 싶은 거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춤을 추는 연주의 파리한 손끝과 “으라파 라구라구”라는 정체 불명의 언어를 (예술을 한답시고) 단단하게 외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연주는 잘 살 수 있을까? 예술을 놓지 않고.
3화 ‘메타멜로’에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창진(구교환 분)이 등장한다. 박하경과 이창진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그 후로도 우연이 계속됐다. 이창진은 박하경에게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불쑥 나타났다. 박하경은 혼란 속에서도 설렘을 느꼈다. 우연으로 연결된 이들은 다음날 오전 10시에 한 극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또 우연처럼 만나기 위해 정확한 장소는 정하지 않았다. 이창진은 박하경에게 귤 한 봉지를 안겨 주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다음날,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이창진은 약속 장소에 아예 안 나타났을 수도 있고, 계속 엇갈렸을 수도 있고, 박하경을 몰래 지켜봤을 수도 있다. 이창진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박하경 여행기’는 여백으로 남겨뒀다.
부산 밀면집에서 엇갈렸던 이들은 서울에 있는 밀면집에서 다시 엇갈린다. 이창진은 박하경이 앉았던 자리에서 밀면을 먹었다. 이창진이 밀면을 먹는 동안 ‘언젠가 만나겠지. 영화는 계속되니까’라는 내레이션이 깔린다. 이창진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컷”이라고 외친다. 어쩌면 박하경과 이창진의 만남은, 이창진의 첫 연출작이 아니었을까.
제목은 ‘박하경 여행기’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일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루 동안 훌쩍 여행을 떠나고 오면, 일주일을 살아낼 수 있는 낭만과 힘이 생긴다. 나도 박하경처럼 일상을 더욱 열심히 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이창진처럼 나만의 연출작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좋다. 걷고, 먹고, 멍때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