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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Mar 12. 2023

2005년식 아반떼 XD를 타는 흙기사

부제 : 내 연금을 노리는 거 아냐?

'나 혼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모든 직장인이 다 그렇겠지만 혼자 살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다.

나의 경우는 우선 동기부여가 약하다. 물론 내가 돈을 안 벌면 안 되지만, 또 혼자서 아껴 쓰면 되니까 돈은 적게 주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곳으로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툭 튀어나온다. 영끌로 아파트를 산 후부터 월급날에 맞춰 매달 대출원리금을 갚고 있지만 강한 동기부여는 월급날 전날과 당일 딱 이틀뿐이다. 대부분 '나 혼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사나' 혼잣말로 끝이나 버리긴 한다.  


심적으로도 뭔가 갑갑하게 해소가 안 되는 느낌도 있다. 업무스트레스로 너무 힘들 때 정말 내 내면의 생각을 다 꺼내서 얘기하며 풀 상대도 없다. 적정한 거리는 지켜야 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순도 100% 내 마음을 다 꺼낼 수도 없고, 부모님께는 의젓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안심을 시켜줘야 하고, 직장이 다른 절친들에게 매번 전화를 해서 직장얘기를 늘어놓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삭히면서 버텨내는 중이다.
직장에서 일할 때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도 하고, 승진이나 성과에는 관심이 없다지만 그래도 '사회적 동물'인데 아주 기본적인 인정의 욕구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나니 가끔 가족들 마저도 혀를 내두르는 '강한 자기주장' 혹은 '날카로운 독기'가 생겨버렸다.


이런 나에게 매일 일상을 공유하고 편하게 밥을 먹는 사람이 생겼다.

'누군가'의 힘은 강력했다. 내가 호감을 가진 사람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퇴근 후에 그 사람과의 약속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 만렙의 일이지만 빨리 끝내고 튀어 나가야 한다는 강한 동력을 만들었다. 하루 10시간은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퇴근하면 설레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며 한날에 두 개의 세계를 겪는 느낌.


자영업자는 처음이라...

무엇이든 잘 못 믿는 성격이라 '남자'라고 해서 무조건 약속을 잡았던 건 아니다.   

이 세차장 주인은 뭔가 이상했다. 내가 그동안 겪었던 사람들은 일적으로 만나거나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들인데 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풀세트 정장을 입은 나를 만나러 오는데도 매번 면소재 반바지에 지저분한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당당히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온다던가(어떨 때는 차에서 내려 로비 앞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사업을 하니 돈은 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모님 집은 차로 30분 정도 가야 해서 근처에 원룸도 얻지 않고 그냥 세차장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남자였다. 세차장을 운영하기 전에는 자동차 정비를 했다는데, 2005년식 아반떼 XD를 아직도 운전하면서 손수 본인이 다 고친 거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예술에 관심이 많아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이 사람이 가진 의외성에 나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십 년 넘게 페이퍼에 찌든 직장인들만 봤지, 이런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위장 남사친'

마침 세차장 주인과 저녁약속이 있는 날, 곧 결혼하는 여동생이 혼자 사는 언니가 걱정돼서 안부연락이 왔다. 저녁에 그냥 친구와 약속이 있고,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온다고 얘기하니 동생이 혀를 차며 말을 이어나갔다.

"위장 남사친이네. 그냥 친구는 약속장소를 정하고 거기에서 만나지, 회사 앞으로 매번 데리러 안와"

"위장 남사친이 뭐야?" 요즘 언어를 잘 모르는 나에게 90년대생의 교육이 시작됐다.

"좋아하는데 거절당할까 봐 말은 못 하고, 그냥 남사친으로 위장해서 옆에 있는 거야. 틈틈이 기회는 보면서"


새로운 용어를 공부하고 세차장 주인의 말과 행동을 보니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5번 정도 만났을 무렵 내가 먼저 툭 말을 던졌다.

"나 좋아하지? 내가 왜 좋아?"

"키 크고, 예쁘고, 공무원이고, 돈도 많은 것 같아서"

그의 대답은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내가 공무원이어서 내 연금까지 노리고 접근했구나' 싶어서 더 이상의 만남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원래 성격이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타지에서 혼자 살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소개팅남이 차로 데려다준다고 해도 인근에서 내렸지 내가 살고 있는 건물도 노출하지 않았던 '방어기제'가 다시 작동했다.

그런 대답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위험과 거부감을 느껴 정리에 들어갔다.

다음번 만남에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한데 친구 이상의 감정은 잘 느껴지지 않아서, 우리 여기까지 하자"

이런 말을 처음 해본 것도 아닌데, 오랜만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인류애가 생긴 건지 가슴 한편이 시렸다. 가슴이 시리다는 표현이 이런 거였구나.




혼자 보내는 잔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처럼 이젠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 세차장 주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만 어른의 흉내를 내며 무심한 척 잔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타 기관에 근무하는 동기오빠가 전화가 왔다.

동기 남자들 중에 유일한 싱글로, 20대에 만나서 친해진 우리는 "40살까지 혼자면, 그냥 우리 둘이 같이 살자"라고 농담처럼 내뱉었던 말이 진짜 그렇게 될까 봐 40살 이후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동기 오빠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세차장 주인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 알게 됐고, 왜 그만뒀는지를.

"솔직하네. 솔직히 남녀사이에도 그런 건 두루두루 다 보잖아. 아닌 척하면서 가식적인 건 없는 것 같은데? "

동기오빠는 어찌 보면 경쟁자일 수 있는 세차장 주인을 나쁘지 않게 평가했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또 너무 칼같이 잘라버렸나' 싶긴 했다. 그렇다 해도 2주 정도 지난 이 시점에서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옛날 사람이라 그건 자존심을 너무 버리는 일이다.  



밤 9시, 야근 중인 사무실.

12시간째 컴퓨터를 보는 게 너무 지겨워서 리프레시를 하려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지금 취미모임이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세차장 주인을 알게 된 그 '취미모임'은 3번 나가고 안 나갔지만, 단톡방을 탈퇴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그냥 무음상태로 해놓고 유령회원으로 있었는데, 얼마나 볼 게 없었는지 그 모임의 단톡방까지 클릭해 본 것이다.

모임장소가 회사 근처고, 그 세차장 주인도 나온 것 같았다. 술 마시며 스트레스는 풀고 싶은데, 세차장 주인이 신경은 쓰이고 살짝 고민하다가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밤 10시에 느지막이 모임에 합류했다. 아주 오랜만에.


세차장 주인 맞은편 자리가 딱 비었길래 앉아버렸다. 진짜 올 줄은 몰랐다는 그의 눈빛을 보며, 스트레스가 폭발해서일까 그날따라 유달리 더 소주가 달아서 4잔째 자작하며 마시고 있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만 마셔"

세차장 주인 옆자리에는 나보다 어린 여자가 앉아있었지만, 나만 보고 있는 그 눈빛에 이끌려 밖으로 둘만 얘기를 하러 나갔다. 잘 지냈냐는 안부인사,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일상적인 얘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으며 마지막인 듯 마음을 표현한다.

"흙표범아~ 그만 좀 골라~ 나 너 정말 좋아해 ㅠㅠ" 

세차장이 시골에 있어서, 나에게는 시골 노총각의 필터가 씌어있는 이 사람이 비에 젖은 강아지 눈빛을 하고 나를 보는데 동물 애호가인 나는 흔들려 버렸다.

'미리 걱정할 필요 있나? 한번 가보지 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연애는 서툰 41살

그날 이후 세차장 주인은 매일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왔다. 매일 본지 열흘쯤 되었을까 그가 차 안에서 파란 장미꽃 세 송이를 건넸다.

"오늘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독특한 게 예뻐 보이길래 샀어"

십몇 년은 족히 된 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에 받은 꽃이 너무 고마웠다. 아침부터 내 생각을 하고 파란색 장미의 존재도 알게 해 준 게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흔이 넘었는데 겨우 세 송이인가 싶긴 했다. 물론, 고마움만 표시하고 아쉬움은 속으로만 남겨뒀다.

집에 돌아와서 절친이랑 통화를 하면서는 고마움 보다 '겨우 세 송이'의 아쉬움을 투덜거렸다.

"아니 나이가 몇 갠데 겨우 세송이야? 돈이 없나?"

절친은 또다시 시작됐구나 이런 말투로 조곤조곤 타이르기 시작했다.

"흙표범아, 이젠 20대도 아닌데 아직도 왜 그렇게 서투니. 어릴 적 넌 쿨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상대방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도 표현을 안 하고 있다가 혼자서 그게 쌓이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리곤 했잖아. 세차장 주인과는 그냥 가볼 거라며, 큰 기대가 없다는 건데, 그러면 이번 기회에 너의 성격도 고쳐가면서 사귀어 보는 게 어때? 네가 바라는 거, 너의 속마음을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서"


그렇다. 때로는 주위 사람이 나를 더 잘 알기도 한다.

나이 41살이 돼서야 '난 뭐든 괜찮아' 말고 내 생각과 감춰뒀던 내 속마음을 표현하는 연습을 시작해보려 한다. 비에 젖은 강아지 눈빛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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