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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Mar 16. 2023

그 남자의 흙심

부제 : 경계심이 풀어진 이유

"눈에 독기가 가득 차있네~ 내가 독기 좀 빼줘야지"

세차장 주인을 매일 본 지 보름 정도 되었을 때부터 의식 하나가 생겼다.

퇴근 후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온 그의 차를 타면, 그는 내 눈과 얼굴상태를 먼저 쓱 확인한다.

유달리 바빴던 날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오늘도 바빴구나. 지금 눈에 독기가 가득 차있네~ 내가 독기 좀 빼줘야지~" 하고는 한 손을 나의 눈에 1~2초간 갖다 대며 "독기야 빠져라~~" 주문을 외운다.

이런 유치한 행동에

"내 공무원 연금을 노리는 연금술사"냐며 핀잔을 줬지만

 웃으며 눈을 감았던 건, 그의 말과 행동에 내 걱정이 한 스푼 정도는 들어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여름휴가지가 발리에서 해운대로 바뀌었다.

작년부터 친하게 지내는 역시나 미혼인 직장동료와 올해 여름휴가는 발리로 가기로 했었다.

타지에서 혼자 사는 상황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 어린이날은 함께 등산을 가고, 생일도 챙겨주며 거의 가족처럼 보내던 그녀는,

내가 세차장 주인을 매일 만나는 걸 알고부터 이제는 휴가를 같이 가긴 어렵다는 사실을 예감했는지

퇴근 후에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너 고향이 어디야?"

"나? 울산"

"어? 나도 울산에서 태어났는데?"

"진짜?? 울산 어디서 태어났는데?

"신정동 XX아파트야, 내가 태어난 곳이"

"헉, 거기 우리 동네야..."

"진짜?내가 이사 안 갔으면, 우리 초등학교 동창이었네!"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생각한 시간이 켭켭이 쌓이면서 나의 여름휴가지는 자연스럽게 해운대로 바뀌었다.

물론, 휴가를 같이 가는 사람도 함께.


한날은 업무 스트레스가 심해 조퇴버렸다.

사무실에서는 나왔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그에게 전화를 하고는 세차장으로 갔더니,

"평일이라 손님이 없네. 소중한 시간이니까 밖으로 자연 보러 가자. 스트레스엔 녹색을 보는 게 좋대" 라며 내 기분도 풀어주고,

서로의 말과 행동에서 뭔가 공통점을 찾으며 '우리 잘 통한다'며 좋아하는 건 20대의 연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20대의 나와 달라진 게 있다면 몇 번 만나고는 선물을 바라고, 명품가방을 사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냥 함께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따뜻하다', '편하다', '설렌다', '재밌다', '말이 잘 통한다'...

세차장 주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내가 찾던 이상형의 조건을 많이 느꼈지만, 사람을 잘 못 믿는 성격이라 마지막 경계심은 가지고 있었다.

'날 맞춰주고 있는 것일지 몰라', '아직 바닥까지 보여준 것은 아닐 거야' 이런 경계심이 3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서서히 없어졌다.


"나 시간 많아. 나랑 같이 가자"

같이 근무하는 친한 동료가 목요일에 부친상을 당했다.

친한 동료들과 금요일에는 조금 일찍 조퇴를 하고 함께 춘천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그날 오후에 내 업무에 비상이 걸려버렸다. 해도 해도 끝이 안나는 업무에 나도 같이 가는 걸 포기하고, 동료들도 내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나만 빼고 춘천으로 가버렸다.

저녁 6시쯤 되어서 일이 겨우 마무리되었고, 정말 친한 동료라서 멀어도 꼭 가고 싶었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언제나처럼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온 그는

"난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아. 나랑 같이 가자, 춘천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오지 뭐" 

라며 춘천으로 출발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도로는 막혔고, 시간을 아끼느라 가는 길에 저녁도 대충 때웠으며, 그는 반바지 차림이라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건 실례라며 식장 밖에서 혼자 1시간을 기다렸다.

왕복 7시간 이상을 운전하고 새벽 3시쯤 집에 도착해서야,

"아 피곤하긴 하다" 딱 그 한마디만 얘기하는 그를 보며, 고마움을 넘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만약에 운전자가 나였다면 출발할 때 막혔던 그 도로 상황을 보자마자

"여기서부터 막히면, 도대체 언제 도착하냐?"며 불평부터 시작했을게 뻔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도착하고 나서는 피곤한 티를 팍팍 냈겠지.


우리 둘의 관계는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긴 했다.

나 혼자 장례식장에 들어가서는 자연스럽게 회사 동료들이 모여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혼자 늦게 온 걸 아는 동료들은 내가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걸 보며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가는 거예요?"

"아니요. 다시 집으로 가야죠.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요."

"아니, 차가 안 막혀도 3시간은 운전해야 하는데, 술을 마시길래 물어본 거예요"

"아... 저 친구가 데려다줬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음... 친구요? 그건 보통사이가 아닌데요. 저 같으면 친한 소꿉친구가 태워달랬어도 절대 안 해요."


"아 대학 안 나왔어?미안, 근데 대학 안 나와도 상관없어"

동갑이라 그런지 확실히 얘기도 잘 통했고, 운동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서 함께 달리기, 배드민턴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한 달째. 갑자기 그가 물었다.

"흙표범아. 나는 XX대 나왔는데 넌 어느 대학 나왔어?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주변에 수많은 명문대 출신들 틈바구니에서 점점 나의 출신학교 얘기를 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초라함을 느꼈고, 그게 컴플렉스처럼 굳어진 모양이다.

내가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으니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 대학 안 나왔어? 미안, 근데 대학 안 나와도 상관없어"

그의 말은 나의 컴플렉스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주었다.

석사 학교까지 얘기하는데는 며칠이 걸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들도 이 사람에게는 점점 편하게 말이 나왔다.   

 

"우리 엄마가 집밥 해준다고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래"

마흔 넘은 아들이 연애를 한다는 걸 알게 된 이 남자의 부모님은 나를 아주 보고 싶어 하셨다.

혼자 살면서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아서, 나에게 '집밥'은 명절, 어버이날처럼 특별한 날에 부모님 집에 가서야 먹을 수 있는 건데 그는 딱 단어로 나를 유혹했다.

"우리 엄마가 '집밥' 해준다고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래"

스무 살 어린애도 아니고 마흔 넘어 다 큰 성인이 아무 생각 없이 친구집에 놀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거절할 수도 없고 어쩌나 고민하길 일주일째. 마침 볼일이 있어서 근처에 갔다가, 남친의 본가까지 들어가 버렸다.

맛있는 집밥, 인자하게 보이시는 부모님 보다도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어린 시절 앨범들'이었다.

막 태어났을 때부터 한 살을 먹을 때마다 한 권씩 정리된 앨범 속 수많은 사진을 보며,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표현과 행동은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나온 거라는 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추석선물이야. 부모님 가져다 드려"

거의 세 달 동안 반바지 3벌, 크록스 1켤레로 버틴 알뜰한 그가 20만 원도 넘는 '한우세트'를 건넸다.

내일부터 추석연휴가 시작되어 전날 저녁에 미리 추석인사도 할 겸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내일 아침 일찍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는 나를 위해 미리 '한우세트'를 준비한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씀씀이에 우선 놀랐다.

경험은 없지만 명절에 인사를 간다거나, 선물을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가 준 한우세트를 들고 부모님 댁에 도착했고,

큰 상자를 보자마자 엄마는 놀라움반+즐거움반의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어머 이게 다 뭐야?"

"한우야" 나는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이 비싼걸 큰딸이 샀어?"

"아... 아니. 남자친구가 사줬어. 부모님 갔다 드리라고"

"뭐? 너 남자친구가 있었어? 생겼으면 바로 말을 했어야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을 하면, 부모님께 달달 볶일까 봐 그의 존재를 알리진 않았었다.

뭐,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부모님은 30대 후반까지는 결혼을 재촉하셨지만, 마흔을 넘기며 '이젠 안 되겠구나' 체념을 하신 것 같았고 "남자친구는 있니?"라고 물어본 적도 없으셨으니까.


한우의 위력은 대단했다.

저 멀리서 '남자친구'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도 신이 나서 묵직한 한방을 보탰다.

"다음 주 주말에 남자친구랑 같이 집에 와라. 아빠가 보고 싶다고 전해"


다음 주에 이 먼 곳을 또 오게 생겼다.

그것도 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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