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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Mar 09. 2023

서울대 변호사를 이긴 세차장 주인

부제 : 내마음 가는대로

희로애락 없는 잔잔한 일상

크게 사치는 못하더라도 혼자 벌어서 먹고 싶은 것은 먹고,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하며, 크게 기쁜 일도 크게 화낼 일도 없는 누군가는 부러워할 잔잔한 일.

어차피 혼자 사나 둘이 사나 아파트 관리비는 비슷할 것 같고, 어차피 용량이 큰 세탁기라 빨래 돌릴 때 절반도 안 차는데 조금 더 넣어서 2인분을 돌리는 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일상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가슴 한켠에 가지고는 있지만, 물론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건 0.3%의 확률이에요"

마흔을 몇 개월 앞두고 가입한 결혼정보회사에서 두 번째로 소개받았던 사업가는 내가 이상형을 만날 확률을 진단해 줬다.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같은 공간에서 굳이 뭘 하지 않아도 편하고, 같이 뭘 하면 더 재밌는 그런 단짝친구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서로 원하는 조건이 맞아 생긴 만남에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가장 먼저 얘기한 내 대답을 듣고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흙표범씨! 지금 단짝 친구 몇 명 있어요? 내 경우는 그런 친구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음.. 한 세 명 정도 있는 것 같은데요? 왜요?"

"내가 통계학을 전공했어요. 자 내 얘기 잘 들어봐요. 흙표범씨, 유치원은 다녔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초등학교부터 치면 초중고 12년간 같은 반 친구들 50명씩 잡으면 600명에다가, 학원 친구들, 대학교, 동아리, 직장생활 10년간 동료들까지 최소한 1,000명은 같은 공간에서 지냈는데, 그중에 단짝친구가 3명 있다는 거잖아요. 0.3%네요." 생각지도 못한 그의 설명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조건이 가장 어려워요. 앞으로 100명을 만나도 못 만날 확률이 크죠, 0.3%인데. 차라리 재력, 외모 같은 명확한 조건이 쉽죠."

그 사업가와의 만남은 한번뿐이었지만 가끔씩 그 0.3%의 확률은 생각이 난다. 누군가를 만날 기회조차 없어서 39살에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서, "어떤 직업의 남자를 원하냐? 나이 차이는 몇 살까지 괜찮냐? 키는 얼마까지 괜찮냐?" 이런 물음에 내가 바라는 이상적 기준을 얘기하긴 했었다. 하지만, 20대에는 그렇게 열광했던 명품가방도 30대 중반 이후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처럼, 30대 중후반 어느새부턴가 '편한 친구 같은 사람'이 이상형의 최우선 순위가 된 것도 사실이다. 10년 넘게 혼자서 편하게 잘살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유하고 잘난 남자와 결혼해서 시댁이다 뭐다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삶을 살 자신도 없었다.


'약간의 다정함도 그리웠나 보다'

주말이면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셀프세차를 하러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최근에 달라진 것이라면 단골 세차장이 바뀌었다. 40대를 받아주는 취미모임은 3번 정도 나가고 그만뒀지만, 그 모임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가 세차장을 운영한다기에 '그래도 아는 사람을 팔아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단골집을 바꿨다. 이 낯선 도시에서 내가 자주 가는 장소에 아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고 세차하러 가면 인사정도만 했었는데, 오늘따라 세차장 주인이 한가한지 세차 스킬을 알려주고 내차도 요리조리 훑어보며 말을 건넸다.  

"어? 공간이 좁은 곳에 자주 주차를 하시나 봐요? 스크래치가 많네요."

"네... 오래된 아파트라서 주차면적이 좁아요. 아끼는 차인데 맘이 너무 아파요"

"이 정도 스크래치는 제가 지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요"

그는 컴파운드, 광택제, 스펀지 등 여러 가지 용품을 바리바리 가져왔고, 몇 분 동안 문지르고 닦아내는 것을 반복하니 차 문짝의 흠집이 대부분 없어졌다. 지난 한 달간 매일 차를 볼 때마다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데, 몇 분이면 되는 것이었다니... 너무 고마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정말 너무 고마워요.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주말엔 바쁘신 것 같으니, 평일 저녁에 괜찮으시죠?"

깨끗한 문짝을 보자마자 뇌를 거치지 않고 가슴에서 입으로 바로 나갔는지,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당황스러웠다. 너무 대놓고 들이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봤더니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월요일 근무를 하면서부터는  휴대전화에 신경이 쓰였다.

퇴근 후에도 업무 말고는 별다른 연락이 없어서 '내 얘기를 잊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요일 퇴근 후에 카톡이 왔다.

"내일 저녁 괜찮아요? 식당은 제가 흙표범님 집 주변으로 찾아보고 내일 낮에 말씀드릴게요"

어떤 식당을 잡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자와의 첫 식사이니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얀색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주변 동료들이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을 알아보고 "오늘 너무 화사하다"라고 한 마디씩 하고 있는데, 그가 맛집을 찾았다며 여기서 저녁 7시에 보자는 카톡이 왔다.

방바닥에 앉아 닭볶음탕을 먹는 노포였다. 마치 그 장소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세차장 주인은 너한테 관심 없어'라고.   

쓸데없이 새하얀 옷을 입고서 닭볶음탕 한 마리를 둘이서 아주 야무지게 손으로 뜯어먹었다. 아주 저렴하게 밥값으로 22,000원을 지출했는데, 커피는 그가 사겠다고 해서 근처 커피숍으로 2차를 갔다.

닭볶음탕 집에서는 먹는데 집중하느라 대화를 많이 못했는데, 커피숍에서 얘기하면서 건축, 인테리어, 여행에 대한 관심사와 그동안의 여행 경험도 비슷해서 얘기가 잘 통한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주제는 요즘 대부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관심 있어하는 주제라 누구와도 이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얼마큼 잘 맞는지 확인사살 차원에서 내가 먼저 물었다.  

"MBTI 어떻게 되요? 저는 estj에요"

"저는 infp요"

아...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다음날 출근을 해서 친한 동료에게 어제 세차장 주인을 만난 얘기를 하니, 그녀는 제일 먼저 걱정과 우려를 표시했다.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믿을 만한 누가 소개해 준 사람도 아니고, 잘 모르는 사람이잖아, 안위험할 것 같아?"

나를 걱정하는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소개해주는 주선자도 없고, 설사 아는 사람이 소개를 시켜준다 한들 그 상대방의 모든 면면을 다 알고 소개해주는 것도 아니니 사람 속을 모르는 것은 비슷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하나도 맞는 게 없는 mbti 성향이지만, 동갑내기 친구로서 뭔가 잘 통하는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있었고, 나이 답지 않은 순수함도 있었다. 다음번 연락이 또 오면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위험하다고 혼자 집에서 따분하게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흙표범님~! 좋아하실 만한 호주 스타일 레스토랑을 찾았어요!"

일주일 뒤에 또 약속이 잡혔다.

이번에는 양식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정리라고 말할것도 없지만, 얼마전에 소개받아 간간히 연락하던 서울대 출신 변호사에게는 더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의무감 처럼 아침, 저녁에 받는 한줄의 카톡 보다 세차장 주인의 카톡과 대화에서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와'하는 조건보다 내 마음 가는대로 선택해버렸다. 인생 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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