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41살까지 혼자살 줄은 몰랐다.
키가 171cm에 아주 검은 피부라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외모는 아니지만 분명히 소수 매니아층은 있었고, 20살에 찾아갔던 점집에서 늦게 결혼하는 사주라며 36살에 시집을 간다고도 했었다.
39살에는 결혼에 대한 조급함이, 40살에는 불혹이 되어버렸다는 우울함이 있었지만, 41살이 되니 일종의 체념 혹은 내려놓음 때문인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40대 중엔 제일 젊다"는 농담까지 던질 여유가 생긴 걸 보면.
11살 어린 막내 여동생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
엄마와 함께 공동육아를 하면서 내가 초등학교 때 분유를 먹이며 키웠던 그 꼬맹이가 이제 서른 살이 되어서 결혼을 한단다. 점점 커가면서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던 여동생이 나에게 결혼결심을 알리며 쓴 편지 속 '그동안 잘 키워줘서 고마워' 문구에 가슴이 뭉클하면서, 동생에게 생긴 새로운 가족으로 '나는 점점 혼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원 가족과 점점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니까. 이미 그럴 조짐은 연애를 하면서 나타나기도 했다.
출산율 1위, 코로나도 재미없어 안 온다는 핵노잼 도시에서 정착이란 걸 해보려 한다.
사실, 직업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은퇴 전까지는 여기에 살아야 하고 서울파견, 외국유학카드도 이미 다 써버리긴 했다.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아가기로 스스로 되뇌며 마음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물론, 핵노잼으로 유명한 도시이니 다이내믹한 재미는 기대하지 않고, 밀도 있고 알차게 혼자서 잘 살아가기로.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뭘 잃어버렸나'
새해가 되고 41세가 되면서 밥먹듯이 하던 야근도 많이 줄어들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그동안 바쁜 삶을 살면서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혼자 잘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1. 꼭지에서 약간 떨어졌길래 덜컥 집부터 사버렸다.(지금은 확 떨어져서 마음이 아프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재테크도 하지 않아서 넉넉한 자금은 없었지만, 점점 나이가 먹을수록 당당한 세입자로 살 자신은 없었다. 혼자 살기 딱 좋은 19평에 주변에 밥집이 많고, 나중에 반려동물을 키울 테니 천변 산책로가 있고, 근처 병원까지 나름 치밀하게 고려해서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핵노잼 도시에 있는 아파트 중에 가장 작은 평수여서 겨우 영끌을 해도 돈에 맞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그래도 집을 사서 좋은 점은 직장을 다닐 강한 동기부여가 생겼고, 어차피 세입자가 있는 집을 사서 입주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이 낡은 집에서 딱 1년만 버티면 나갈 수 있다는, 끝이 보이는 기다림이 주는 힘이 생겼다는 점이다.
2. 퇴근 후에는 달리기를 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주말에는 김밥집 도장 깨기, 빵지순례를 다니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식사 후 운동으로는 애지중지하는 내차를 직접 셀프세차하며 1~2시간 동안 주변의 아저씨들 틈바구니에서도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무아지경에 빠지곤 한다.
그래도 핵노잼의 본성은 어쩔 수 없어서 부족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다른 도시로 원정을 떠난다. 백화점, 아울렛 하나 없는 도시라 아이쇼핑을 하러 인근 청주, 대전까지 가기도 하고, 혼자서 호텔이나 펜션에서 자고 오는 것은 더 외롭게 느껴져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적정선을 지키며 제주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3.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직장이지만, 그래도 미혼이면서 마음이 맞는 몇몇 동료들과 친분이 생겼다. 직장사람들과 퇴근 후 사적인 교류는 하지 않았던 나인데 이제는 약간은 둥글둥글 해졌는지, 아니면 하루에 절반 이상을 보내는 직장에서도 마음 붙일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쉬는 날은 인근 도시까지 함께 놀러 가기도 하고, 집에 모여 술 한잔 하는 날엔 그 집에서 자고 오기도 하면서 혼자 사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래도 뭔가 가슴 한켠에 있는 씁쓸함을 해소하고자 40대를 받아주는 취미 모임을 겨우 찾아서 '작은모임'을 가입했다. '이 핵노잼 도시에서 나잇대가 비슷한 다른 직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하는 호기심과 '전혀 접점이 없는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나의 성향이 아웃사이더 기질 인 데다가 이제는 직장, 학교 같은 공통요소가 없이 오픈마인드로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느끼며 3번 정도 모임을 나간 후 그것 역시 시들해졌다.
"언니! 소개팅할래요?"
다른 기관에 근무하는 동기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직장생활에, 퇴근 후에는 아들 2명의 육아전쟁터로 다시 출근을 하면서도 자기 계발도 놓치지 않아 나보다 3배는 바쁘게 사는 그녀가 내 생각까지 해서 소개팅을 만든 것이다. 서울대 출신이어서 똑똑한데 소탈하기까지 한 인간미 있는 동료라는 얘기에 따뜻한 봄날에 41살의 소개팅이 잡혔다. 결혼정보회사에 돈을 주고 한 번에 40만 원짜리 소개팅을 한 이후로는 이렇게 소개팅을 주선해 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맙다. 혹시나 불만족스러운 만남을 주선하고 듣게 될 불평을 감수하고도 나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마음이 느껴지니까.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게 대략 느낌이 오고(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나와 맞겠다-맞지 않겠다 판단이 빨리 된다는 점이다(나의 독선일수도 있지만). 40대에는 썸 혹은 연애를 해보지 않아서 '40대의 예의를 갖춘 마음표현'이 그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대방이 가진 99% 에너지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이미 다 써버렸고, 남은 1%만 가지고 나를 만난 것 같은 뜨뜻미지근한 만남과 마치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출근 후 한 줄, 퇴근 후 한 줄씩 묻는 안부카톡 정도에 '곧 정리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예전처럼 적극적인 차단에 나서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그 미약함 마저 사그라들 것이라는 느낌적 느낌.
이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 소개팅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