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10년을 했는데 겨우 이거라고?
부제 : 자유로운 영혼의 텅장
입사 3~4년 차부터 동기모임은 슬슬 줄어들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어떤 날은 점심, 저녁으로 보던 동기들은 3~4년 차부터는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을 병행하느라, 아니면 결혼할 상대와 연애를 하느라 바빠졌다. 어느새부턴가 일 년에 한 번으로 줄어든 공식적인 동기 모임도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나가지 않았고 결혼식은 축의금 봉투만 전달해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회에서의 출발은 같았지만 한껏 꾸미고 나가도, 그들보다 뭔가 뒤처지고 모자란 것 같은 기분도 있었고, 직접 만나 얘기를 해도 업무도 다르고 지금 닥친 생활이 달라서 공통화제를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그들의 결혼과 육아생활에 100% 공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나의 혼자만의 생활을 다시 가질 수 없는 자유로움으로 생각하기에.
대부분 여자동기들이 육아휴직을 하는 기간에 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직장생활을 잠시 벗어났다.
싱글이 직장을 유지하며 사무실을 잠시 떠나 있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인 유학시험에 붙어 2년간 중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30대 후반에 다시 직장에 복귀했다.
"전세기 보내준다며? 2년 동안 전세기 언제 보내주나 기다렸는데..." 2년 만에 돌아온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친한 동료들이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 "중국부자가 한국인구만큼 많다는데. 꼭 남편감 찾아와!" 당부했고, 나는 "남편감 찾으면 바로 전세기 띄울게요"라고 대답했었다. 그걸 잊지 않고 날 보자마자 예전의 대화로 농담을 건네는 동료들이 참 반가웠다. 그렇게 떠나 있고 싶었던 직장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사이에서도 오랜만에 느끼는 소소한 정.
'다들 집 한 채씩은 있구나...'
한국 복귀를 계기로 몇몇 동기들을 몇 년 만에 만났다. 직장생활, 결혼생활, 나의 유학생활을 즐겁게 얘기하는 와중에 나만 빼고 대부분이 집 한 채는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기면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마련한 동기들이 다수였고, 미혼의 경우도 수도권에 있던 근무처가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아파트 특공을 받으면서(빚을 걱정하긴 했지만)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같은 월급을 받으며 출발은 같았는데, 왜 나는 뒤처졌을까'
집에 돌아와서 통장을 꺼내고 보험 증서까지 보면서 그동안 내가 모아놓은 게 얼마인가 계산을 해봤다. 집 전세금에 통장잔고를 더하고, 개연연금은 더했는데, 암보험료는 넣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10년 동안 모은 게 이 정도인데, 퇴직까지 남은 기간은 20년 정도 되니깐 앞으로 더 모을 수 있는 돈은 이 정도겠구나' 예상이 되니 더 우울해졌다.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재테크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월급의 절반 정도는 예금, 적금을 돌리면서 모았는데도 왜 이리 상대적으로 뒤처졌을까 생각해 봤다.
집을 안 샀던 것. 그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만기 된 적금은 언제나 조금 더 큰 전셋집을 구하거나 회사와 가까운 거리로 이사를 오는데 쓰였다. 인사이동도 있었고 자의 반 타의 반 이사를 자주 다녀 한 지역에 정착하려는 생각도 안 했고, 또 혹시나 언제 결혼할지 몰라서 살림도 안 사면서 언제나 풀옵션 원룸이나 오피스텔 전세만 찾으며 살았다. 간혹 더 싼 전셋집을 찾았을 때는 엄마에게 조금 빌렸었던 전세금을 일부 갚는 효심에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은근히 기대했던 '집은 나중에 남편 될 사람이 해오겠지'라는 망상까지.
워킹맘이 퇴근 전까지 아이들 학원 뺑뺑이 돌리 듯, 나도 혼자인 주말을 뭐라도 하며 채웠다.
혼자 국내 당일치기 여행, 도쿄, 대만 등 근거리 주말밤도깨비 여행, 스페인어 배우기, 파주까지 가서 도자기 찻잔 만들기 등 주말에는 뭐라도 해야 안심이 되어 취미 부자가 되었다.
남들은 애도 키우고 뭔가 부지런히 보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데, 주말에 집에서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말을 보내고 나면 월요일에는 더 피곤함과 후회가 밀려와 뭐라도 계획하면서 혼자 보내는 주말 스케줄을 빡빡하게 채워놨다.
혼자 있는 주말에는 유일하게 입을 움직일 수 있는 먹는 것에 집중했다.
자취 초반에는 요리를 했지만, 얼마 안 가서 혼자 먹는데 음식 만들고 - 치우고 - 다음 끼니 준비하는데 온 하루를 다 쓰는 게 부질없다고 생각되어 배민-요기요-쿠팡잇츠를 골라가며 사용했다. 최소 주문금액을 맞추고, 배달비까지 2만 원씩은 끼니마다 지출했는데, 처음에는 혼자 먹기에 양이 많았지만 적응의 동물이라 딸려온 반찬만 조금 남기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문제는 1인가구임에도 엥겔지수가 무지무지 높아졌고, 비싼 돈 주고 찌운 살을 빼러 운동을 결제하는 무한 반복이 일어난다는 것.
선배말을 철석같이 따라 피부관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여드름 피부인 나는 주기적으로 피부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관리비가 제일 아깝다. 주름관리도 아니고 여드름에 돈을 써야 하다니.
직장생활 초창기인 20대 말에 한 선배가 내 피부를 보며, "매월 40만 원씩, 1년이면 500만 원짜리 적금보다 그 돈으로 매월 피부과 다니는 게 어떻니? 500만 원 더 있는 너보다, 피부 깨끗한 네가 더 매력적일 것 같아"라는 충고를 아주 충실히 따랐다
출발이 같았던 동기들과 차이나는 자산을 보면서 현타가 왔다.
혼자서도 바쁘게 이것저것 사는 나에게 결혼한 동료와 동기들은 부러움을 표시하기도 하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결혼하지 말고 그렇게 멋지고 자유롭게 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수많은 활동 덕분에 다채로운 과거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활동이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오히려 스스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선제적으로 준비한 측면이 더 큰 것 같다. 대부분 2개월도 못 가서 그만둔 것을 보면.
하지만 10년 동안 동기들과 벌어진 격차를 느끼고 나서는 무료함을 없애려는 자기계발 보다 혼자 살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박혔다.
단순하게 '돈'만 모으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 이상 젊지도 않으니 떠돌이 생활은 접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기 위한 준비로 재테크에도 관심을 갖고 작은 집도 하나 마련하고, 진짜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하나 찾아보고, 시골이라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사는 이 동네를 알아가면서 나만의 '케렌시아'도 찾아보는 노력을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