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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Feb 27. 2023

로망과 궁상사이

부제 : 뷰만 좋은 집 vs 가장 싼 전셋집

서른아홉, 드디어 로망의 집을 찾았다.

서울에서 1년간의 파견생활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구하기였다.

기간이 1년이니 월세집으로 알아봤고, 조건은 2개뿐이었다.


1. 거리 조건 : 출퇴근 편의를 위해 직장 반경 5km 이내에 있을 것.

2. 로망 실현 : 내가 서울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주변환경과 집안 뷰가 좋을 것.

물론, 월세는 최대 60만 원으로 맞춰야 하는 가장 어려운 조건도 있었다.


우선 지도어플로 끌리는 지역 3곳을 골랐고, 뭐든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해 봐야 믿는 성격이라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얼마 전 소개팅으로 한번 만났던 나보다 7살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차가 필요하지 않냐며 같이 동행해 주겠다'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는 주말에 혼자 대중교통으로 서울 곳곳을 다녔다.

그 남자분은 내 기준에서 나이가 너무 많고, 나보다 키도 5센티 정도 작아서 더 이상 안 만날 게 뻔한데, 나의 서울 집 주소를 노출할 수는 없었다.


삼청동, 서촌을 거쳐, 남산 바로 아래 '해방촌'이란 동네에서 내 서울 로망의 집을 찾았다.

동네에서 남산타워가 아주 가깝게 보이고, 지대가 높아서 집안 창문으로 서울전경이 보이는 3층 빌라였다. 집에서 저녁에 와인을 마시며 서울뷰를 볼 생각에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물론, 집주인아주머니의 펌프질도 있었다. "배우 최민수 씨 알죠? 최민수 씨가 어렸을 때 여기 살았어요. 그 양옥집을 허물고 이 빌라로 지었는데, 집터가 아주 좋아요. 여기 살면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이사 온 첫날부터 로망은 깨졌다.

주택가 좁은 골목이 주차전쟁이라 이사 온 첫날에 애지중지하는 내 차의 조수석 문짝을 긁어버렸고, 옆집과 너무 붙어있는 건물 구조상 실외기 설치가 어려워서 1년은 에어컨 없이 살아야만 했다.

여름에 실내온도가 저녁에도 36도까지 올라가서 식물도 타 죽어버린 빌라 꼭대기층에서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분당에 사는 여동생집으로 피신해 버렸다. 출근시간도 1시간으로 늘어나 버렸고, 서울집에 월세 60만 원을 내고 여동생에게도 10만 원을 내면서 한 달을 에어컨을 쐬며 살았다.  

로망이 불편함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도 참을 수 없는 정도로.

< 로망만 따른 참혹한 결과물 >


무더웠던 21년 여름, 세종시 부동산은 더 뜨거웠다.

돈도 부족했고, 서울에서 로망만 따른 참혹한 결과를 교훈 삼아 세종에서 구할 전셋집은 무조건 실리를 추구하기로 했다. 가진 돈에 1억 정도를 대출받으면 회사 근처에 급 전세로 나온 괜찮은 24평 아파트를 들어갈 수 있었지만, 어차피 야근하며 자주 들어가지도 않을 집에 대출이자까지 부담하기는 싫었다.

무조건 돈에 맞춰서 XX면 XX리에 위치한 20년 이상된 10평대 아파트를 구했다. 주소지가 서울 용산구에서 면 단위로 바뀌었고, 내 기분 역시 뭔가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긴 했다.

대출이자를 아끼는 대가는 컸다.

이 아파트는 글로벌 아파트였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외국인(중국, 동남아, 스탄국가 등)을 이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고, 아파트 안내문도 3개 국어로 쓰여있는 놀라운 곳이었다.

이웃의 고성방가, 밤이 되면 잘 보이는 집 주변의 유흥업소 간판들, 어두운 복도식 아파트 구조에 가끔은 내가 '타인은 지옥이다'의 임시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나 직장동료 중에는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친한 동료들을 혼자 벌어 혼자 다 쓰면서 뭘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떠냐고 안타까워했다. 어쩔 수 없었다. 계약을 했으니, 2년을 버티는 수밖에.

30대 중반부터는 후회할 때마다 '왜 이렇게 나잇값을 못할까'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하나에 꽂히지 않고 신중하게 여러 가지를 고래해서 만족할 만한 중간점을 찾는 게 아직도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밖에서 보이는 나는 이미 불혹을 지난 중년인데, 마음은 아직 20대라 어른 노릇이 참 쉽지가 않다. 어릴 때 봤던 40대는 진짜 어른 같았는데, 이런 철없는 어른이라니.


4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를 때가 많다.

꼼꼼한 것 같으면서도 즉흥적일 때도 있고, 궁상맞다 싶을 정도로 실리를 추구하지만 가끔 야수의 심장으로 하고 싶은 건 턱턱 지르는 모습에 스스로 놀랄때가 많으니.

돌이켜 보면 사람을 만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고, 좋아하는지 잘 모른 채로 들어오는 소개팅은 다 나갔지만

직장, 학벌 등 조건에 혹했다가 소프트웨어가 안 맞는 걸 발견하고 끝내거나,

연하라는 얘기에 혹했다가 그 사람의 포장지가 너무 얇다며 외부 시선을 신경 쓰면서 끝내거나,

성과 없는 만남이 반복되어 지칠 때는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가.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는 내가, 어떻게 나와 맞는 인생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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