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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Mar 01. 2023

결혼, 서른 전에도 가능했다?

부제 : 국제결혼??

거슬러 올라가면, 서른 전에 아주 빨리 갈 수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그걸 다 놓치다니...


한류열풍의 시작은 2004년 중국이었다.


중국어 초급 수준으로 떠난 어학연수 둘째 날, 가족에게 중국에 잘 도착했다는 이메일을 보내려고 학교 도서관에 갔다. 당시에는 노트북이 없어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로 간 건데, 도서관을 들어가려고 하니 관리인이 출입을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영어로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사용할 수 없대, 점심시간 끝나고 오래"라고 말하며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점심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제안했고, 우리는 일본식당에서 카레밥을 먹었다. 중국어 공부를 하러 왔는데, 영국식 영어 듣기&말하기 연습이 시작됐다.

'오마르'는 화교출신으로 말레이시아 국적에 런던에 근무하는 변호사였다. 나보다 10cm 정도 크고, 나보다 하얀 그는 매력적인 외모임은 분명했다. 점심을 다 먹어갈 때쯤  "너 기숙사는 몇 동이야? 난 000동인데, 1인실이야. 난 아침잠이 많아서, 내일 나 모닝콜 좀 해주지 않을래? 그리고 아침 같이 먹고 수업 들으러 가자"라는 너무 적극적인 얘기에 20대 초반 '유고걸'이 아닌 '유교걸'이었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에게 모닝콜을 하지 않았고, 아침을 같이 먹지도 않았다. 즉, '오마르'와의 시작은 영화 같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지금 생각해도 제일 아쉬운 기회다. 그간 놓쳤던 재테크 기회보다도...)


중국이 기회의 땅이었음은 분명했다. 기숙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아프리카 말리에서 온 유학생이 호감을 표시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너무 흥겨운 제스처와 아직은 낯선 피부색 때문에 이후에는 계속 그 청년을 피하고 다녔다.(지금 생각해 보면 촉망받는 정부지원 유학생이었다)


직장이 확정된 후 떠난 유럽에서도 한류는 이어졌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몇 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시험합격의 자축과 앞으로 자유롭지 못할 시간을 미리 위로하며 몇 달 동안 TV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유럽여행 경비를 마련했다.


떠나기 전날 "오~~ 샹젤리제~"를 계속 몇 시간째 부르는 나를 보며 엄마는 처음 이런 말을 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큰딸, 엄마는 큰딸 믿어. 조심히 잘 다녀올 것이라는 걸". 엄마의 이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 달간 8개국을 돌아본 서유럽 배낭여행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국적인 건축물과 풍경도 물론 좋았지만, 이미 한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합격을 포기하고 외국에서 살아야 하나?' 생각될 정도로 한국에서는 없었던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에서 표를 검사하는 직원이 내 표를  보면서 "나도 피렌체에서 업무가 끝나. 나는 피렌체에 사는데,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제안했지만, 서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고, 아직 도착도 안 해서 '모르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과 '깜깜한 밤'에 만날 수는 없어서 거절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청년이었다)  

독일 베를린 도미토리에서 마주친 벨기에 청년은, 기타를 가져와서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묻고는 직접 세레나데를 불러줬고 밖에 나가서 '저녁'식사 제안을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은빛이 도는 눈동자가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엄마의 "큰딸 믿어"가 생각나면서, 도저히 밖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도미토리 안에서 낮에 슈퍼에서 산 차가운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직장생활 첫해 떠난 여름휴가지에서도 한류는 끝나지 않았다.

혼자 베트남 하롱베이에 갔는데, 현지 여행사를 통해 1박은 하롱베이에 배를 정박해 놓고 배안에서 자는 투어에 참여했다. 나처럼 혼자온 사람 중에는 대만 청년이 있었다. 마치 함께 여행온 사람처럼, 함께 저녁을 먹고, 밤에는 선상에서 하롱베이 하늘에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별을 보며 밤새도록 대화했다. 물론, 여기까지였다. 그의 명함을 받았지만, '서울-부산 롱디연애'도 안 해본 나에게 '한국-대만 롱롱디'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해외에서 왜 더 인기가 있었을까...

가장 유력한 것은 내 '마음'인 것 같다. 외국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가 "너는 언제나 웃고 있어. 참 행복해 보여"라고 했던 말을 돌이켜 보면, 여행을 가던 연수를 가던 외국에 있었을 때의 내 표정은 언제나 웃고 있고, 타인의 행동과 실수에도 참 관대하다. 맑은 하늘을 봐도 설레고, 길거리에서 쪼그린 채로 먹는 국수 한 그릇도 행복함을 느끼는 상태는 한국에서의 짐을 벗어던지고 떠난 외국에서 주로 나왔던 것 같다.

물론, 큰 키와 검은 피부처럼 전형적이지 않은 외모가 외국에서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수도 있고, 내숭이 없고 너무 직설적인 말표현이 한국에서는 친해지기 전까지는 다가오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다가온 기회를 자르지 않고, '유교걸' 마인드를 잠시 내려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긴 하다. 한두 번 더 만나고 별거 없이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누가 아나? 혹시 내가 런던이나 피렌체에 10년째 거주 중인 주부가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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