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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서 서평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존재를 부정하는 세 가지의 방식

by 채PD

아내가 추천해 줘서 읽게 된 책이다.


처음엔 솔직히 좀 긴장했다.

책 표지에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큰 영감을 받은 책" 이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지젝의 책을 읽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덮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그가 극찬한 책이라니..

어쩐지 또 어려운 문학적 혼돈에 빠지게 되진 않을까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처음 몇 장은 꽤 수월하게 읽혔다. 문체는 담백하고 단순하다.

전쟁 중, 시골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 쌍둥이 루카스와 클라우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훈련하고,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며 기록을 남긴다.

1부는 그 자체로 몰입감이 강했다. 전쟁 속에서 감정조차 사치가 되는 상황, 어린 쌍둥이의 생존 투쟁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2부는 형 루카스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형은 혼자 살아가며 과거의 흔적들을 되짚는다.

국경을 넘다 아버지를 잃는 장면에선 꽤 큰 반전의 충격도 있었다.

이 지점까진 구조도 비교적 명확하고, 이야기의 흐름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때까진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3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도무지 뭐가 진짜고 뭐가 허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쌍둥이 중 한 명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

이야기 전체가 누군가의 상상이거나 거짓된 기록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

그리고 서술자의 정체조차 불분명한 흐름 속에서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읽는 내내 “지금 이게 소설 안의 현실인지, 작중 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 읽고 난 지금도 마음속엔 여전히 물음표 몇 개가 둥둥 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혼란스러움 자체가 작가가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안겨준 감각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중심보다는, 이야기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는 존재의 감각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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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슬라보예 지젝, (우)아고타 크리스토프


기록, 타인의 인정, 자기 인식
존재를 부정하는 세 가지의 방식


책 제목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여기서 세 가지 거짓말은 무엇일까?

나에게 세 가지 방식으로 다가왔다.


첫째는 ‘기록’.

1, 2부에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묘사된 이야기들이 사실은 전부 허구였을 가능성.

노트, 기억, 서술.. 이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는데, 끝에 가선 그게 다 거짓이었을 수도 있다.

존재를 증명해 줄 것 같던 기록이 오히려 존재를 흐리는 도구가 된 셈이다.

즉, 기록이란 존재의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미.


둘째는 ‘타인의 인정’.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서로를 외면하고 부정한다.

서로를 기억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타인의 시선 속에서 확인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차갑게 들이민다.

즉,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존재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는 은유가 아닐까.


마지막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나라는 존재는 애초에 있는 걸까?

자아가 해체되고, 고통 속에서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은 너무도 절박하고 애처롭다.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존재는 기록과 타인의 인정, 그리고 스스로의 인식을 통해서 증명해내야 한다는 그런 심~오한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p. 302


작품 전체는 결국,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실제와 허구, 기억과 망각,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지며, 우리는 어느샌가 정체성의 수렁에 빠진다.

읽으면서도 끝까지 헷갈렸고, 다 읽고 나서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책은 바로 그 ‘헷갈림’을 통해 존재의 불안정함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두 번은 못 읽겠다.

그러나 한 번으로도 꽤 깊은 충격을 받은 건 확실하다.

전쟁이 남긴 건 단지 폐허나 상처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혼란일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낯설고도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런 실존주의적 혼란, 기억과 자아에 대한 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

다만,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시작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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