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입봉 축하한다.”
방송계에서 입봉이란 한 프로그램의 메인 연출이 되는 순간을 뜻한다.
조연출이나 막내 작가로 방송 일을 시작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기획부터 제작, 결과까지. 성과도, 실책도, 변명도 모두 자신의 몫이 된다.
“이제 네가 책임자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잘해라.”
입봉까지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장르마다 다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시사교양은 1~2년, 예능은 3~5년, 드라마 연출은 7~10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러닝타임의 차이 때문이다. 시사교양은 짧은 꼭지들이 많은 반면, 예능과 드라마는 긴 호흡을 다뤄야 한다.
그러나 시간차이는 있을지라도 방송 일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한 프로그램의 메인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시사교양에는 입봉이 한 번 더 있다. 바로 러닝타임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입봉이다.
“오, 벌써 한 편 통으로 맡았어? 빨리 맡았네.”
짧은 꼭지 입봉은 비교적 기회가 많다. 하지만 한 시간짜리 다큐는 다르다. 무게가 있고,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며, 무엇보다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PD들이 프로그램 입봉 이후에도 수년을 더 보내며 ‘한 시간짜리’를 기다린다.
“3·1절 특집이야. 잘해봐라.”
내 첫 한 시간 다큐 입봉은 SBS 스페셜 3·1절 특집 다큐멘터리였다. 주인공은 우당 이회영 선생. 비록 처음 기획부터 내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우당 이회영이 누구지?'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나는 그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우당 이회영은 조선시대 때부터 손꼽히는 부유한 양반가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그는 그의 여섯 형제들을 한데 모아 전 재산을 정리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형제들은 모두 흔쾌히 뜻을 함께 했다. 여섯 형제가 처분한 집안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에 달했다. 그마저도 급하게 정리한 금액이었다. 실제로는 훨씬 더 큰 부를 지닌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주로 떠나 세운 학교가 바로 신흥무관학교다. 우리가 교과서에 배웠던 바로 그곳.
우당 이회영 선생을 다루었던 기존의 방송과 도서를 검토하고, 독립운동사에 관련된 책들도 여러 권 읽었다. 선생의 후손들을 만나 그분에 대한 증언과 기록을 찾았고, 역사학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담았다. 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하고 추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수개월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그의 생을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나는 다큐멘터리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태도를 요구하는 작업이라는 걸 실감했다.
우당의 여섯 형제들 중 다수는 해방을 보지 못했고 객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둘째 형 이시형만이 귀국해 초대 부총리를 지냈다. 우당도 해방이 되기 불과 몇 년 전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면 알수록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분들이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촬영지는 뤼순 감옥이었다.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명을 달리 한 그곳에서 나는 그분들의 명복을 빌고 감사함을 전했다.
그렇게 수개월간은 촬영과 편집이 끝나고 드디어 프로그램이 온에어 되었을 때, 나는 방송을 보며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스스로에게도 묻고 있었다.
SBS스페셜 3.1절 특집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깊다. 수개월의 자료 조사와 취재, 오랜 시간의 촬영이 필요하다. 그만큼 PD는 누구보다 그 사안을 깊이 알게 되고, 프로그램이 전하는 메시지도 결코 가볍지 않다.
겉멋으로 다큐를 하고 싶어 했던 나 같은 사람도 막상 제작에 들어가자 프로그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넓어졌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이후 나는 운 좋게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더 만들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 특히 연변 지역을 자주 오가며 독립군의 흔적을 따라다니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PD이기 이전에, 역사의 한 장면 위에 그들과 나란히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요즘 방송을 시작하는 친구들은 입봉이 빠르다. 프로그램도, 채널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입봉은 여전히 특별하다. 특히 한 시간짜리 다큐 입봉은 지금도 여전히 무게와 의미가 있다. 비록 예전처럼 축하 파티까지 열어주지는 않지만,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자랑스러운 순간임은 분명하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입봉 하느냐에 따라 내가 바라보는 세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방송 PD라는 직업은 그렇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렌즈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