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가 되다

트렌드는 반박자만 빠르게!

by 채PD
CP _ Chief Producer


CP는 방송국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책임 프로듀서다.

만드는 PD에서, 고르는 PD로 자리가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2013년. 방송국에 입사한 나는 그렇게 CP가 되었다.



“이게 다 몇 개예요?”
“대략 스무 개? 많으면 서른 개쯤 되지 않을까.”


신규 프로그램 기획안 공모에 접수된 페이퍼들이 책상 위에 수북하다. 하나씩 넘겨본다.


음.. 이건 어디서 본 것 같고, 이건 너무 올드하고, 이건 또 우라까이(재탕) 네.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

뭔가 “이건 꼭 해보고 싶다” 싶은 기획안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는 정말 귀하다.

PD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역시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다.
신규 프로그램은 담당 PD가 직접 기획하기도 하지만, 방송국 인하우스 PD의 경우 제작사에서 제안한 기획안들도 함께 검토한다.
내 아이디어면 어떻고, 남의 아이디어면 어떠랴. 시청률만 잘 나오면 출신 성분(?)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잠깐 기획안 이야기를 하자면, 방송 기획안은 보통 한두 장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다. 요약된 한두 장만으로도 단번에 이해돼야 한다.

쓰는 사람도 그렇게 써야 한다. 길게 쓰면 안 된다.

그래야 읽는 사람이 ‘아, 얘가 지금 이걸 하겠다는 거구나~’하고 바로 감이 온다.


문제는 방송이라는 결과물이 영상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런 기획안이 있다고 치자.

“여섯 명의 남자가 여행을 떠나 유쾌하게 놀고 옵니다.”
“여섯 명의 남자가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리얼 예능입니다.”


어휴~ 밋밋해라.


하.지.만


첫 번째는 <KBS 1박 2일>이고, 두 번째는 <MBC 무한도전>이다.


방송에서는 WHAT보다 HOW가 훨씬 중요하다.
같은 재료라도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이 된다.

똑같은 멤버들이라도 나영석 PD가 만든 <1박 2일>과 다른 PD가 만든 <1박 2일>은 아마 전혀 다른 방송이었을 것이다.

물론 HOW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WHAT이 필요하고, 그전에 “내가 방송을 그동안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경력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작의 기회가 온다.

어쨌거나.


방송국에 입사한 뒤 다양한 기획안을 받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인하우스 PD의 가장 큰 장점은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론칭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프리랜서 PD도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방송국 인하우스 PD의 결정이 필요하다.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하우스 PD라고 해서 아무나 프로그램을 론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국 안에서도 기획 경쟁과 피칭은 치열하다.
정년까지 근무하면서 자신이 기획하고 론칭한 프로그램이 한 편도 없는 PD도 적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넘을 거다.

그만큼 ‘내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2013년, 방송국에 입사했을 때 나는 이미 10년 차 프리랜서 PD였다.
제작에 대한 자신감은 어느 정도 붙어 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내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다.


“종편 방송국이 네 개나 생겼어. 그것도 종편이야, 종합편성.
그야말로 모든 장르를 다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이 얼마나 축복받은 타이밍인가.

결국 나는 제작사들의 기획안을 잠시 덮어두고,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직접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편집기를 붙잡고 밤을 새우던 일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기획하는 일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만드는 건 사실 가장 쉬운 선택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바보 같은 선택일 때가 대부분이다.

정말 중요한 건 사람들이 원하는 것, 지금 보고 싶어 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보면 곧 좋아하게 될 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가려운 데를 먼저 긁어줘야 한다고 해야 할까.
트렌드는 딱 반박자만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WHAT보다 HOW라고 했지?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남이 좋아할 것'이다.


방송국 생활 동안 나는 운 좋게도 몇몇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론칭해 볼 기회를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성공작은 없었다.

있었다면 아마 내가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진 않겠지.
아.. 슬프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론칭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방송국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기회는 훨씬 줄었거나, 어쩌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방송국 인하우스 PD의 가장 큰 장점은 프리랜서보다 높은 보수와 처우, 안정적인 고용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론칭을 해볼 기회가 훨씬 더 가깝게 있다는 점이다.


다음 편부터는 나의 야심 찼던 좌충우돌 프로그램 제작기를 꺼내 보겠다.


아.. 벌써부터 눈물이 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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