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삼촌, 착한 농부를 찾아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채널A의 [먹거리 X파일]
MC 이영돈 PD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던지던 이 멘트는 꽤나 유명했다.
SNL에서 개그맨 신동엽이 패러디하면서 더 널리 알려진 탓도 있지만.
[먹거리 X파일]은 먹거리로 장난치는 업자들의 실태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비양심적인 제조 현장, 비위생적인 유통 과정 등을 잠입 취재로 파헤치며 큰 호응을 얻었다.
동시에 정직하고 퀄리티 높은 음식을 만드는 업체들을 발굴해 ‘착한 식당’으로 소개하며 먹거리의 음지와 양지를 함께 비췄다. 이 프로그램은 채널A 개국 원년인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넘게 사랑받으며 방송국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때는 2017년 초.
프로그램의 힘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템 고갈이 가장 큰 문제였다.
뭐, 5년 동안이나 했으니 고발할 만한 곳은 웬만하면 다 고발하지 않았겠는가.
“아무래도 이번엔 새 프로그램을 하나 론칭해야 할 것 같아.
먹거리 X파일이 워낙 유명했으니까,
그 후속 느낌으로 가보자. ‘먹거리’를 소재로.”
제작 본부장님의 오더였다.
방송 프로그램의 론칭은 대략 두 갈래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
다른 하나는 기존 프로그램의 리뉴얼.
내가 방송국에 입사한 뒤 처음 맡게 된 제작은 [먹거리 X파일]의 ‘후속 기획’이었다.
리뉴얼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도 아닌 애매함..
하지만 어쨌든 ‘먹거리’라는 키워드 하나만 주어졌으니, 사실상 완전히 새 프로그램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오.. 드디어 내가 신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구나.’
설렘과 함께 고민이 시작됐다.
PD가 새로운 기획을 맡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모니터링이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힌트를 얻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 다른 것, 이전에 하지 않았던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내 성향이다.
어떤 PD들은 ‘지금 통하는 것’을 가장 먼저 찾는다. 트렌드를 우선시하는 거지.
이 경우는 과거에 이미 했던 걸 다시 가져오는, 이른바 ‘우라까이’가 되기도 한다.
우라까이는 남이 한 걸 그대로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드는 PD 입장에서는
‘지금 이 시기에 딱 맞는 프로그램이야. 지금이 타이밍이야!!’
라고 믿고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아, 다시 말하지만 나는 따라 하는 게 체질적으로 좀 싫다.
당연히 어떤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시청률만 잘 나오면 장땡이다. 방송은 늘 과정은 기억되지 않고, 결과만 남는다.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하여튼.
‘먹거리’를 소재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지 수개월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요리 서바이벌을 할까? 숨어 있는 맛집을 찾아다닐까? 아니면 전국 특산물을 모아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볼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딱 꽂히는 게 없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셰프’를 중심에 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2015~2017년은 말 그대로 요섹남 전성시대였다.
요섹남.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셰프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았다.
[마스터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그리고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까지.
‘셰프를 데리고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그 무렵 나는 프로그램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 여러 셰프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다 강레오 셰프를 만났다.
그는 [마스터셰프 코리아]에서 냉정한 심사와 독설로 차가운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말수는 적지만 굉장히 수더분하고 푸근한 사람이었다.
'역시 방송국 놈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구나..'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특급 호텔의 총책임자였던 그가 좋은 식재료를 찾아 매주 전국의 농부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거의 5년 넘게. 와우~
뒤통수를 조선무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좋은 식재료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요리하는 사람이잖아!’
좋은 재료를 키우는 농부를 국내 최고의 셰프들이 찾아간다.
세프가 농부들의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주고, 농부를 응원하고 격려한다.
이것이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유쾌한 삼촌, 착한 농부를 찾아서]
MC는 강레오, 이연복 셰프.
‘삼촌’은 두 셰프의 친근한 이미지이면서 전국의 농어촌을 뜻하기도 했다.
기획의 근거는 나름 명확했다.
1. 셰프 전성시대다! 요섹남에게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 타이밍이 좋다.
2. 젊은 농부들을 찾아가자! 젊고 패기 있는 농부들은 신선하다.
3. 셰프들이 농부를 찾아가는 모습은 새롭다. 스타 셰프들의 또 다른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자.
4. 그림은 최대한 잔잔하고 평화롭게! 착한 농부들을 소개한다는 설정으로 이전의 먹거리 X파일의 부정적인 그림들과 대조되도록 만든다면 이 부분도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다.
나는 이 논리로 회사를 설득했다.
첫 회는 강원도 정선. 곤드레를 키우는 20대 청년 농부들을 찾아갔다.
셰프들이 직접 곤드레를 따고, 함께 요리하고, 해 질 녘 석양을 배경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림은 예뻤고 편집도 정성껏 했다.
부푼 마음으로 방송을 내보냈다.
그래서 시청률은?
.
.
.
.
.
박! 살! 났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프로그램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처참했다.
실패의 이유는 뭐였을까?
그야..
재미가 없었던 거지 뭐..
사실 이유는 어려가지가 있었다.
너무나 서정적으로 착하게만 만든 것이 첫 번째.
여전히 시청자들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 혹은 빠른 것을 선호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착한 농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왜 저 사람이 착한 농부이지?'를 명확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보다는 젊고 패기 있는 젊은 사람, 그런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좀 더 집중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여러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아무 토끼도 제대로 잡지 못한 셈이었다.
음.. 실패 분석은 여기까지만 하자. 길게 하면 아프다.
프로그램은 20회 만에 종영했다.
종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기회가 또 온다면 그땐 다큐가 아니라 예능을 해야지.. 어휴..”
프로그램이 너무 착하고 잔잔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반신반의.
‘나한테 또 기회가 오긴 올까?’
우리 방송국에만 PD가 백 명도 넘는다.
드물게 오는 제작 론칭 기회는 정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기획안이야 또 계속해서 쓰겠지만 그렇다고 꼭 방송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회가 안 오면 어쩔 수 없지..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2년 뒤.
기적처럼, 다시 한번 제작의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