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인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낡은 생각을 밀어낼 뿐
튜링에서 GPT까지,
인공지능 70년 역사를 한 권에
천재 혹은 괴짜로 불리던 40명의 연구자와 창업가들을 따라가며, 인공지능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인물들을 나열하는 데 목적이 있는 책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좌절하고, 다시 부활해 왔는지, 그 과정을 그린 하나의 연대기에 가깝다.
초기의 AI는 낙관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사고를 논리와 규칙으로 정리하면 기계도 생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뇌를 모방하면 지능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신경망이라는 접근도 등장한다. 전자는 기호주의이고 후자는 연결주의다.
하지만 입력해야 할 규칙은 끝이 없었고, 초기 신경망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기호주의, 연결주의 두 접근 모두 한계를 드러내며 AI는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이른바 ‘AI 겨울’이다.
그러나 모두가 등을 돌린 시간에도 일부 연구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능은 규칙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서 스스로 학습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이 시기에 조용히 축적된 머신러닝의 방법론과 실험들이 이후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며 데이터와 컴퓨팅 성능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신경망은 다시 힘을 얻고 딥러닝으로 발전한다.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오늘날의 AI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 책은 AI의 성공을 기적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실패와 집요한 인내, 그리고 소수의 고집스러운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여준다.
AI의 등장은 인간의 종말이 아니라,
낡은 노동 윤리에 대한 사망 선고가 아닐까
AI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극단을 오간다.
하나는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당하는 디스토피아.
특이점(싱귤래리티) 이후, 통제 불가능한 지능이 인간을 밀어낸다는 서사다.
또 다른 하나는 노동에서 해방된 유토피아.
로봇과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인간은 창의적 사고와 사유에 집중하며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나는 비교적 명확하게 후자에 가깝다.
인간은 원래 창의적인 존재이고, 각자 고유한 능력과 서사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산업화 시대가 만들어 놓은 제도와 관습 속에서, 모두가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노동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생각 역시 오래된 전제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가짜 노동’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일, 효율과 무관한 절차, 관성적으로 유지되는 직무들이 얼마나 많은지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AI와 로봇의 등장은 이런 비합리성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굳이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노동의 개념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어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은 오랫동안 ‘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 왔다.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의 경제 시스템이 측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생산성과 효율을 압도적으로 끌어올리는 시대에는, 무엇을 ‘일’로 보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평가와 보상의 방식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AI를 두려움이나 환상으로 소비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기술 그 자체보다 AI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선택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데이터를 먹이고, 어떤 목표를 부여하며, 어떤 가치에 맞춰 조정하느냐에 따라 AI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결국 AI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공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AI 입문서라기보다, AI 시대를 살아갈 인간을 위한 교양서에 가깝다.
기술의 속도에 휩쓸리기보다, 한발 물러서서 “우리는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는가”를 묻게 만든다.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의미 있고 오래 남는다.